‘YUJI’는 표절 아닌 대필, 누구도 읽지 않았다는 증거

훌륭한 연설문도 치밀한 취재가 전제
의뢰자와 대상자에 대한 분석이 중요, 절대 3분 넘지 말아야!

박근영 기자 / 2022년 11월 17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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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서전 이야기에서 잠깐 벗어나 대필의 좀 더 다양한 영역을 살펴보는 것도 의미 있는 일일 성싶다. 대필의 범주는 매우 넓어서 비단 자서전뿐 아니라 크게는 학술 논문이나 강연문, 작게는 인사말까지 다양한 분야에서 대필이 이뤄진다. 이런 경우의 대필 역시 당연히 금전적인 계약이 따르는 것은 물론이려니와 경우에 따라 자서전보다 더 큰 금액이 대필료로 책정되는 것도 다반사다.

논문 대필은 전문가 집단에서 더 자주 일어나는데 이것은 전문가가 비전문적인 개인에게 어떤 이유에서건 개인의 실력이나 연구와 상관없이 자격을 부여하기 위해 벌이는 일탈 행위다. 최근 김건희 여사의 박사학위 논문에 대해 표절 시비가 붙었는데 이것은 대필을 자주 해본 내 입장에서 보면 표절이 아니고 대필이라 추정한다. 만약 김건희 여사가 그 논문을 직접 썼다면 ‘YUJI’라는 단어는 아무리 남의 논문을 베껴서 썼다고 해도 바보가 아닌 이상 발견하지 못할 리 없는 너무나 뻔한 오류다. 그럼에도 유지가 YUJI로 쓰였다는 것은 김건희 여사가 대필논문을 받은 후 단 한 번도 읽어보지 않았다는 분명한 증거다. 아마도 그 논문을 대필한 사람은 대필 의뢰자가 논문을 읽어보지도 않을 것이란 사실을 짐작했을 것이고 그래서 자신만 알아보도록 YUJI라는 간단한 흔적을 남겼을 것이다. 뿐만 아니라 그 논문은 합격이 떼논 당상이었기 때문에 논문을 제출한 김건희 여사도 논문을 심사한 교수진도 YUJI가 붙은 제목은 물론 논문 전체를 읽어보지 않았을 것이다.

실제 많은 대학의 많은 석박사 학위 논문들이 이런 엉터리 같은 방법으로 복사기로 복사하듯 표절된 예는 지금까지 방송·언론이 보도한 것으로만 해도 과할 정도로 많다. 단언하건데 그것은 표절이 아니라 대필이었을 가능성이 훨씬 높다. 그러니 그런 논문이 제대로 쓰여질 리 없고 그것이 제대로 심사될 리 또한 없다. 이런 현상은 쉽게 돈으로 학위를 사려는 자와 그만큼 쉽게 돈을 벌고 지식도 아닌 ‘수법’을 팔려는 자들의 속 검은 이해관계가 맞아떨어진 결과일 뿐 표절자 한쪽만의 잘못이라고 할 수 없다. 다시 말해 중요 인사들의 논문 표절이 끊임없이 횡행하는 이유는 그만큼 대학의 논문 검증 기능이 형편없었다는 반증이며 한편으로는 논문 심사 속에 도사린 범죄를 묵과해왔다는 증거일 수 있다.

너무나 다행인 것은 이렇게 부실한 논문으로 학위를 받은 사람들이 무언가 정말 중요한 일을 하려고 나섰을 때 반드시 ‘검증’이라는 도마에 오르게 되고 지금의 온갖 명쾌한 시스템들이 그 허구적 실체를 가차 없이 밝혀낸다는 사실이다. 그러니 엉터리 학위를 받았거든 딱 그 엉터리가 통할 만큼의 일에만 써먹어야지 더 이상 욕심내면 안 된다. 일순간 심사는 속일 수 있어도 철저한 시스템과 도도한 국민의 눈은 절대 통과할 수 없다는 사실을 깨닫기 바란다.

논문 대필이 불법적인 것이고 양심의 문제와도 결부된 것이라면 연설문 대필은 법과 상관도 없을뿐더러 양심과도 전혀 상관없는 일이다. 연설문은 단지 연설문일 뿐 대필자를 써서라도 잘 쓰는 것은 훨씬 중요한 일이다. 때문에 대통령을 비롯한 주요 공직자들은 물론이고 어지간한 단체의 수장들은 연설문 대필에 익숙하다. 특히 경험이 얕거나 글에 자신 없는 정치가들은 중요한 연설문을 대체적으로 보좌진이나 대필자에게 의뢰해서 작성하는 것이 상례다.

내 경우에도 무수히 많은 연설문을 대필해서 썼고 그것이 해당 연설자의 이름으로 명문화된 것도 많다. 그렇다면 이런 연설문을 쓸 때는 어떤 관점에서 써야 할까? 많은 사람들이 연설문을 매우 가볍게 생각해서 아무 행사 아무 때나 ‘인사말 하나 써줘’ 하면 뚝딱 나오는 줄 안다. 물론 일반적인 행사의 연설이라는 것이 판에 박아서 경험 많은 대필자들은 행사가 어떤 행사인지만 알면 무난하게 연설문을 써줄 수 있다.

그러나 제대로 된 연설문을 쓰려면 반드시 알아야 할 것들이 있다. 가장 큰 3대 요건은 1)연설할 사람은 어떤 사람인가? 2)연설할 곳은 어떤 곳인가? 3)연설자의 연설할 곳과의 관계는 무엇인가? 등이다. 이것만 알면 기본적인 연설문을 쓸 수 있다.

그러나 연설이 좀 더 감명 깊거나 설득력을 얻으려면 반드시 취재가 필요하다. 내 경우 내가 모르는 사람의 연설문을 쓸 때는 반드시 연설할 사람과 통화부터 한다. 그래서 연설할 사람과 연설할 곳의 특징과 성격, 연설을 들을 사람들의 현황 등을 상세하게 파악하고 연설문을 작성한다. 그래야 리드미컬하고 가치 있는 연설문을 쓸 수 있다.

한번은 어떤 선배가 연락해 자기가 아는 지인의 연설문을 써달라고는 부탁했다. 문제는 그 선배가 연설할 사람의 정보를 전혀 주지 않고 무턱대고 대충 하나 써달라고 떼를 쓴 것이다. 당연히 그 부탁을 사양했다. 대충 쓰는 것은 잘 쓰는 것보다 훨씬 어렵다. 대충이란 것이 어떤 것인지 모르기 때문이고 그런 연설문은 존재하기 않기 때문이다.

연설할 사람과 연설할 대상 양쪽을 다 아는 경우라면 연설문 쓰는 것은 식은 죽 먹기다. 왜냐하면 연설자의 평소 소신과 그 단체에 대한 태도는 물론 연설자의 어투까지 잘 알고 있는데다 연설할 대상이 필요로 하는 사항과 그 대상의 현재 상태까지 상세하게 알기 때문이다. 영광스럽게도 나는 한때 내가 속한 모 단체의 역대 회장님들의 연설문을 6년이나 썼었다. 2년마다 회장님이 바뀌어도 그 단체의 범주 안에서 평소 잘 알던 분들끼리 바꾸는 일이라 아무런 어려움이 없었다. 심지어 정확하게 그 회장님들의 어투까지 글 속에 표현해 놓아서 회장님들이 연설하고 나서 연설문이 입에 잘 붙어서 매우 자연스러웠다는 공치사를 듣기도 했다.

좋은 연설문에 아주 중요한 수칙이 있다. 반드시 짧아야 한다는 것이다. 내가 쓰는 연설문은 아무리 길어도 5분을 넘기지 않고 보통은 3분 이내 마치는 것을 원칙으로 쓴다. 이렇게 하는 이유는 권위와 품격 모두를 지키기 위함이다. 대신 ‘취임사’는 소신과 정책을 넣어서 7분에서 길게는 10분 정도로 꾸민다. 그것은 향후 그 연설문이 해당 단체나 조직의 지표가 되기 때문이다. 그렇지 않은 일반적인 인사말은 3분에서 ±10초 오차범위로 쓴다. 이때 3분의 기준은 연설하는 분의 어투와 말 속도를 고려한 시간이다.

3분의 이유도 분명히 있다. 대한민국 행사는 아직도 후진국형을 벗어나지 못해 인사하는 사람들이 마이크 붙들고 온갖 너저분한 말을 길게 해야 잘했다고 착각한다. 그래서 마이크 잡는 분들이 일일이 행사장에 나온 누구누구에게 인사하고 어떤어떤 일에 축하하는 것을 앵무새처럼 반복하고 나서 본론으로 들어간다. 본론에 들어가서도 뼈대 있는 말은 없이 공자왈 맹자왈, ‘누구의 말씀에 따르면~’ 식으로 끝없이 떠든다. 그러다 보면 ‘끝으로~’ 할 때까지 8분, 10분 막 넘어간다. 그 앞에서 사람들은 아무도 듣고 있지 않는데 자기만 신나서 떠드는 것이다. 이런 인사말은 하지 않느니만 못하다.

그래서 3분 이내에 핵심적인 사항을 이야기하고 상황에 따라 그 안에 재미있는 이야기를 슬쩍 끼워서 쓴다. 이렇게 하면 듣는 사람들이 지루하지 않게 짧고 강력하게 연설할 수 있다.

내가 대필해준 연설문 중에는 우레와 같은 환호성으로 연설자가 영웅이 된 일이 있었다. 내가 나온 대학의 어느 선배가 자신이 졸업한 고등학교 동창회장으로 추대돼 모교 졸업식에서 한 연설문이었다.

 그 내용이 파격적으로 ‘이 문을 나가는 즉시 마음껏 놀아라’는 것이었다. 물론 논다는 것은 새로운 창의력을 전제한 것이었지만 그 마음껏 놀아라는 말에 졸업생들이 열렬히 환호했다며 아주 만족해서 답례했다.

궁극적으로 대필 연설문은 대필을 의뢰하는 사람의 철학과 신념이 근간이 되겠지만 상단 부분 대필하는 사람의 철학과 신념도 중요하게 반영된다. 의뢰자와 대필자의 이상이 들어맞으면 더 이상 좋을 수 없다. 내가 지금까지 대필한 인사말의 주인공들은 그런 면에서 나와 참 조화로운 분들이었다. 덕분에 참 행복하게 인사말을 쓸 수 있었다. 이 자리를 빌어 감사드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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