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인식 시인의 경주인문학산책] 청마 유치환의 경주 풍경

한국문학의 중심에 있었던 청마의 경주시절

경주신문 기자 / 2022년 10월 27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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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토함산 등산로 입구에 있는 청마 유치환 시비.

사랑하는 것은
사랑을 받느니보다 행복하나리라
오늘도 나는
에메랄드빛 하늘이 환히 내다뵈는
우체국 창문 앞에 와서
너에게 편지를 쓴다.

청마 유치환의 대표시 ‘행복’은 이렇게 시작한다. 시낭송 행사에 가보면 청마의 시는 빠짐없이 등장한다. ‘행복’을 비롯하여 ‘바위’, ‘깃발’, ‘생명의 서’, ‘울릉도’ 등 시인은 떠났어도 그의 시는 여전히 애송되고 있다.

청마가 아무런 연고도 없는 경주로 옴으로 인해 경주는 바야흐로 문학의 르네상스 시대를 맞이할 수 있었다. 경주고 교장(1955년 2월~1959년 9월)과 경주여고 교장(1961년 6월~1962년 3월)으로 두 차례에 걸쳐 5년 6개월 정도 경주에서 살았다.

청마의 작품 중 경주를 노래한 시들은 생각만큼 많지는 않다. 산문 1편과 시 7편 정도이다. 물론 경주와 간접적으로 관련된 작품들과 경주 생활 중에 쓴 작품들은 많이 있을 것이다.

청마는 경주에 온지 한 달 만에 안압지와 반월성, 남천을 거닐며 고도 경주의 느낌을 ‘경주에 와서’라는 짧은 산문 한 편으로 표현했다.

경주생활 중에 쓴 시 가운데 대표작으로 황오리 5호총이라는 부제가 붙은 ‘고분에서’를 꼽는 사람들이 많다. 이 시는 발표 당시에는 ‘황오리 5호총’이라고 발표했으나, 추후 발간된 시집에는 제목이 ‘고분에서’라고 되어 있다.

이외에『제9시집』에는 경주의 유적지들이 들어간 시들이 많다. 경주로 온 이듬해 4월 경주 외동 모화리 봉서산 자락에 위치한 원원사지를 방문하고 쓴 ‘원원사지’와 소금강산 굴불사지의 사면석불을 노래한 ‘사면불’과 ‘잠자리-석굴암에서,’ 상봉-계림에서, ‘역투’ 등이 경주를 노래한 대표적 시편들이다.

↑↑ 청마가 찾아갔던 경주 외동읍 모화리 소재 원원사지.

원원사(遠願寺)! 원원사(遠願사)!
그 무슨 간곡하고 아득한 소망이었기
이도록 애닯게도 이름 들려 남음이랴
-시 원원사지 일부


경주에서 쓴 시들의 공통점은 경주지역 화강석과 많은 대화를 하였음을 알 수 있다. 위에 언급한 시들 외에도『제9시집』에는 ‘예술- 석수(石手)가 만드는 것이 아니라 그 속에 감추어 둔 것을 깨뜨려 찾아내는 것이다’ 라는 아포로즘과 단장 54 바위- 얼굴은 안으로 내면을 밖으로 하고 있는 것’이라고 노래하고 있다. 또한 미발표 유고시집속 ‘석상에(石像)에’ 라는 제목의 시에서도 그 흔적을 찾아볼 수 있다.

-돌아가는 것이다
그 아득한 시원(始元)의 데로
이제는 돌아가는 것이다

(중략)

싸늘한 살갗 하나 사이하고
저쪽과 이쪽이 지척도 아니언만
소리도 닿지 않는 그 억겁 리-
이제는 돌아가는 것이다
-(청마의 시 ‘사면불(四面佛)’ 일부)


↑↑ 청마의 시 사면불의 현장, 소금강산 사면석불.

흔히 미당 서정주의 ‘석굴암대불’과 비교되기도 하는 같은 제목의 시 ‘석굴암대불’은 경주로 오기 전에 쓴 작품이다. 1953년《신천지》에 발표하였으며 1954년 발행된『청마시집』에 수록되어 있다.

청마는 경주의 자기의 거처를 요지암(遙持庵)이라 이름 짓고 여러 유적지들을 산책하며 사색을 즐겼다. 이 시기는 생떽쥐베리와 사르트르에 빠져있던 시기이기도 했다.

경주시절은 왕성한 문단 활동을 하였음을 알 수 있다. 경주고 부임 이듬해인 1956년 경북문화상을 받았으며, 1957년에는 한국시인협회 초대회장으로 피선되었으며 예술원장 재연임 피선되기도 했다. 또한 시집『제9시집』을 간행하기도 했다. 1958년에는 아세아재단 자유문학상을 받았으며『류치환 시선』과 자작시 해설집『구름에 그린다』를 발간했다. 1960년에는 시집『뜨거운 노래는 땅에 묻는다』를 발간하기도 했다. 이처럼 경주시절은 한국문학의 한가운데에 자리하고 있었고 그를 찾아오는 사람들이 많았다. 한국시인협회장과 예술원 회원이라는 타이틀도 타이틀이었지만 그는 사람을 좋아하는, 술을 좋아하는 로맨티스트였다.

그런가 하면 아나키스트의 면모도 엿볼 수 있다. 관 주도 행사에 학생들이 동원되는 일에 강력하게 반대하였으며, 이승만 정부에 반기를 들며 비판하는 글을 발표하기도 했다. 이 일로 인해 경주고 교장직에서 물러나는 일을 겪기도 했다. 청마의 시 ‘칼을 갈라’와 ‘뜨거운 노래는 땅에 묻는다’ 등에 그의 강직한 성격과 뜨거운 피가 잘 나타나 있다.

↑↑ 경주고 교정에 있는 청마유치환의 교훈 ‘큰 나의 밝힘’ 새김돌.

한편으로 청마는 애주가로 경주에 많은 에피소드를 남기기도 했다. 지금은 사라져서 아쉬움이 큰 쪽샘의 주막집들을 자주 들리곤 했다. 지역의 예술인들은 물론 부산과 대구, 포항 등 멀리서 찾아오는 많은 문인들과 밤을 새우며 술잔을 주고받기도 했다. 멋과 낭만이 함께했던 쪽샘이 사라진 것은 여러모로 아쉽다. 문향이 꽃피던 그곳의 사라짐은 경주의 또 다른 상실이라 아니할 수 없다.

허만하 시인은『청마풍경』이라는 저서에서 청마의 흔적을 찾아 원원사지를 비롯하여 쪽샘 등 경주 곳곳을 누비며 청마의 풍경을 그려내기도 했다. 송희복 교수는 유치환의「경주 시절과 시의 공간 감수성」이라는 주제로 청마의 경주 시절의 시를 분석한 연구 논문을 발표하기도 했다.

청마와 관계된 여러 지역에서 다양한 형태로 그를 추억하고 기념하고 있다. 청마문학관과 청마기념관, 청마문학상, 청마문화제 등이 있는 통영이나 거제는 말할 필요도 없다. 이중에서도 특히, 이영도 시조 시인과의 5000통 넘는 연서를 쓴 편지의 시인 청마를 기념하여 통영우체국을 아예 ‘청마 우체국’으로 이름을 바꾼 일은 특별하다. 청마가 교통사고로 생을 마감한 부산 동구에서도 초량동 산복도로에 전망대와 우체통을 설치하고 그의 예술과 문학정신을 기리고 있다.

5년 6개월을 살다간 이곳 경주에도 청마의 시정신을 기리는 흔적들이 곳곳에 있다. 경주고 교정에는 재직 당시 만든 교훈 ‘큰 나의 밝힘’ 새김돌이 남아 있어 재학생들에게 자긍심을 일깨워주고 있다. 불국사에서 토함산을 오르는 등산로에는 청마시비가 세워져 있다. 청마의 시 ‘석불암대불’의 일부를 새긴 이 시비에 얽힌 웃픈 에피소드도 숨어 있어 재미를 더해 준다. 그의 문학정신을 계승하는 청마백일장도 40년 넘게 이어져 오고 있다. 워낙에 뛰어난 시편들이 많아서 묻혀있지만, 경주를 노래한 뛰어난 시편도 많다. 청마의 시를 찾아내고 애송해주는 것이 경주에 살고있는 사람들의 일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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