삼릉 가는 길(上)-경주 남산 ‘삼릉 가는 길’ 따라 왕의 길을 걷다

경주신문 기자 / 2022년 10월 20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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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경주 월성 상공에서 본 월성과 남산. 월성과 남산 사이 나지막하게 솟은 산이 도당산이다.<제공: 문화재청>

1400여 년 전 어느 정월 대보름날이었다. 김유신이 김춘추와 함께 공을 차다가 일부러 김춘추의 옷깃을 밟아 옷고름을 찢어 여동생 문희에게 꿰매게 했다. 그런 인연으로 김춘추와 문희의 만남은 시작됐고, 문희는 임신까지 하게 됐다. 김유신은 그날 이후 임신한 누이동생을 불태워 죽이겠다고 온 나라에 소문을 퍼뜨렸다.

어느 날 선덕왕이 남산으로 행차하는 것을 본 김유신은 뜰에 장작을 쌓아놓고 불을 피워 연기가 치솟게 했다. 선덕왕이 이를 보고 대체 무슨 일이냐고 물었다. 신하들이 답했다. “김유신이 처녀인 누이동생이 임신한 것을 알고 불에 태워 죽이려는 것입니다” 선덕왕이 다시 물었다. “그것이 누구의 짓인가?” 때마침 가까이에서 왕을 모시고 있던 김춘추의 안색이 크게 변했다. 선덕왕은 조카의 소행임을 알고 크게 꾸짖은 후 “어서 가 김유신의 누이동생을 구하라”고 명했다. 김춘추는 선덕왕의 명을 받고 달려가 왕명을 전하고 화형을 중지시켰다. 그 후 두 사람은 혼례를 치렀다.

김유신의 막내여동생 문희가 언니 보희의 꾼 꿈을 사서 신라 제29대 왕인 태종무열왕 김춘추(재위 654~661년)의 왕비가 된 이야기다. ‘삼국유사’의 ‘태종 춘추공’조에 실린 내용으로, 선덕왕의 남산 행차 길이 배경이다.

↑↑ 사금갑 설화의 배경이 된 남산 동쪽 자락 서출지(書出池) 전경. <출처: 경주시 관광자원 영상이미지>

◆옛 문헌 속 신라 왕의 남산 행차
신라 왕의 남산 행차와 관련된 ‘삼국유사’ 기록은 더 있다. 쥐와 까마귀의 도움으로 신라 소지왕이 목숨을 구한 ‘사금갑’(射琴匣) 이야기가 그 중 하나다. ‘거문고 갑을 활로 쏘아라’라는 뜻의 사금갑은 ‘둘 죽이고 하나 살리기’, ‘오곡밥 먹는 유래’라는 옛 이야기의 원형이기도 하다. 이 사금갑 설화의 배경이 된 곳은 남산 동쪽 자락 서출지(書出池)다.

신라 21대 소지왕 재위 10년(488년) 정월 보름날 천천정(天泉亭) 행차 때의 일이다. 소지왕 앞에 까마귀와 쥐가 몰려와 울더니 쥐가 사람처럼 말했다. “까마귀가 날아가는 곳을 살피시오” 소지왕은 장수에게 명해 까마귀를 뒤쫓게 했다.
 
장수가 남산 동쪽 기슭 한 연못에 이르렀을 때 한 노인이 봉투를 들고 나타나 왕에게 전하라고 말했다. 봉투 겉에는 다음과 같은 글이 적혀 있었다. ‘열어 보면 두 사람이 죽고 열어 보지 않으면 한 사람이 죽을 것이다.’

이 봉투를 전해 받은 소지왕은 “한 사람이 죽는 것이 낫다”고 생각해서 열어 보지 않으려 했다. 그러나 점을 치는 일관(日官)은 “두 사람은 보통 사람, 한 사람은 왕”이라고 해석했다.

결국 일관의 뜻을 따라 봉투를 열어 보니 ‘거문고 갑을 쏘아라’고 적혀 있었다.
왕은 궁으로 돌아와 거문고 갑을 향해 활을 쐈는데, 그 안엔 왕비와 정을 통하던 승려가 있었다. 소지왕은 왕비와 승려를 함께 처형하고 죽음을 면했다. 이 일 이후 노인이 나타나 봉투를 전해준 못을 서출지라 부르고, 정월 보름은 오기일(烏忌日)이라고 해서 찰밥으로 까마귀에게 공양하는 풍속이 생겼다는 게 ‘삼국유사’가 전하는 내용이다.

남산 서편 자락 포석정에 얽힌 설화도 있다. 통일신라 말기 제49대 헌강왕(재위 875~886년) 때였다. 왕이 포석정에 행차하자 남산의 신이 나타나 춤을 췄다. 그런데 신은 좌우의 신하들에게는 보이지 않고 오직 왕에게만 보였다. 왕은 친히 신의 춤을 추어 보여줬다. ‘삼국유사’ ‘처용랑과 망해사’조에 나오는 이야기다.

이런 이야기의 배경이 된 남산은 신라에서 신성시되던 산이었다. 신라인들은 남산을 ‘불국토’인 수미산쯤으로 여겼다. 옛 신라인들은 남산의 단단한 화강암을 쪼아 부처를 새겼고, 평평한 둔덕마다 불탑을 세웠다.

그렇다고 민초들만 남산을 찾은 것은 아니었다. 통일 이전의 왕부터 천년 왕조의 끝자락 경애왕까지 수많은 신라 왕은 남산을 즐겨 찾았다.
 
주보돈 경북대 명예교수는 “왕궁이 있던 월성에서 신궁으로 추정되는 나정, 그리고 그곳을 좀 더 지나 포석정까지는 행차한 기록이 자주 등장한다. 당시는 정치보다 제사에 더 큰 의미를 뒀던 때였고, 남산, 특히 서남산 쪽은 왕이 직접 행차했던 대표적인 제의 공간으로 볼 수 있다”고 말했다.

↑↑ ‘삼국유사’ ‘처용랑과 망해사’조에 통일신라 말기 제49대 헌강왕의 행차가 전해지는 포석정의 가을. <출처: 경주시 관광자원 영상이미지>

◆신라 왕 숨결 품은 서남산 둘레길
경주시가지 남쪽에 있는 남산은 남북으로 길게 뻗어 있다. 북쪽의 금오봉(金鰲峰, 466m)과 남쪽의 고위봉(高位峰, 494m) 두 봉우리를 잇는 산과 계곡 전체를 남산이라고 부른다.

남산엔 골짜기를 따라 수십 갈래 답사 코스가 나있다. 이 길을 통해 많은 이들이 남산에 오르며 수많은 유적을 만난다.

반면, 경주시가 2010년에 접어들며 조성한 ‘남산 둘레길’은 아는 이가 많지 않다. 남산 둘레길은 남쪽의 고위봉과 북쪽의 금오봉을 잇는 남북 능선을 축으로, 동쪽의 ‘동남산 가는 길’과 서쪽의 ‘서남산 가는 길’ 등 2곳으로 나뉜다.

이들 두 길은 몇몇 유적을 찾아가는 길에 짧은 오르막이 있는 것을 제외하면 대부분 남산 자락을 에둘러 가는 평지다. 남산의 낮은 곳을 연결해 걸으며 마을과 들판 곳곳에 있는 문화재를 만나볼 수 있다.
차량이 다니는 도로와도 어느 정도 떨어져 있어 마음 놓고 주변 풍광을 구경하며 걷기에 안성맞춤이다. 길이 갈라지는 곳마다 이정표가 서 있어 한두 곳을 제외하면 길을 이어가는 데 어려움이 없다.

다만 동남산 쪽은 주능선까지 이르는 거리가 서남산 쪽에 비해 짧고 경사도 훨씬 가파른 탓에 ‘동남산 가는 길’에선 남산 주능선을 보기가 어렵다는 단점이 있다. 길 막바지인 통일전 근처를 지나면서부터는 남북으로 길게 뻗어 있는 남산 능선을 바라볼 수 있다.

동남산 가는 길은 교동 월정교 남단에서 출발해 인왕동 사지(인용사지)~춘양교지~상서장~고청 윤경렬 고택~불곡마애여래좌상~남산탑곡마애불상군~미륵곡 석조여래좌상~경북산림환경연구원~화랑교육원~헌강왕릉~정강왕릉~통일전~서출지~남산동 동·서삼층석탑을 거쳐 염불사지로 이어진다. 거리는 10㎞ 정도로 대다수 구간이 평지라 체력적으로 힘들지는 않다. 쉬엄쉬엄 걷더라도 4시간 정도면 충분하다.

서남산 쪽 둘레길인 ‘서남산 가는 길’은 신라 왕의 주요 행차로였을 것으로 추정되는, ‘왕의 길’로 불릴만한 길이다. 서남산 가는 길이라는 이름 외에 ‘삼릉 가는 길’로도 불리는데, 이정표나 안내도에도 주로 ‘삼릉 가는 길’로 표기돼 있다.

길은 동남산 가는 길과 마찬가지로 월정교 앞에서 시작한다. 천관사지~오릉~김호 장군 고택(월암종택)~남간사지 석정~일성왕릉~양산재~나정~남간사지 당간지주~창림사지 삼층석탑~포석정~지마왕릉~태진지~배동석조여래삼존입상~삼릉~경애왕릉으로 이어진다. 월정교 남단에서 천관사지와 오릉을 거치지 않고 도당산으로 난 산길을 따라 화백정과 도당산 터널을 지나 김호 장군 고택 앞으로 합류하는 길을 택할 수도 있다. 전체 거리는 동남산 가는 길과 비슷한 10㎞ 정도로 4시간 정도 걸린다.

삼릉 가는 길은 숲길이 대부분인 동남산 가는 길과 달리, 마을과 마을을 잇는 길로 이어져 있다. 걷는 내내 남산을 조망하며 고즈넉한 농촌 풍경을 만끽할 수 있다. 특히 가을에 걷기 좋은 길이다.

김운 역사여행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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