월정교-뚜벅뚜벅 걷다 보니… 1000년 신라 역사 한눈에

경주신문 기자 / 2022년 10월 06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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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월정교 야경. <사진제공=경주시>


반월성 남쪽 토끼 고개 옆
半月城南兎嶺邊

무지개 다리 그림자 문천에 거꾸로 비치네
虹橋倒影照蚊川

용은 하늘로 오르며 꼬리 땅에 드리우고
蜿蜒騰漢尾垂地

무지개는 시냇물 마시며
허리 하늘에 걸쳤네
螮蝀飮河腰跨天


↑↑ 월정교 야경. <사진제공=경주시>

고려 중기 문신이자 대표적인 시인인 김극기(金克己)가 쓴 ‘월정교’(月淨橋)란 시의 일부다. ‘신증동국여지승람’(新增東國輿地勝覽) 권21 고적(古跡)조에 실려 있다.

그가 노래한 월정교는 통일신라시대에 지어졌다. 왕궁인 월성과 남천 남단을 연결하는 주요 통로였던 것으로 추정된다.

‘삼국사기’는 “경덕왕 19년(760년) 2월에 궁궐 남쪽의 문천(蚊川, 지금의 남천) 위에 월정교(月淨橋)와 춘양교(春陽橋) 두 다리를 놓았다”고 전한다. “원성왕 14년(798년) 3월에 궁 남쪽 누교(樓橋)가 불에 탔다”는 기록도 있다.

그 후 고려 명종 대(1170~1197년)에 시인 김극기가 월정교를 주제로 시를 지었고, 충렬왕 6년(1280년)에 중수한 기록이 남아있다. 하지만 조선시대 기록인 ‘신증동국여지승람’은 “월정교는 옛날 본부 서남쪽 문천 가에 있었다. 두 다리의 옛터가 아직도 남아있다”고 기록하고 있다. 이 같은 내용을 근거로 미뤄보면, 월정교는 적어도 13세기 말까지 본래의 기능을 유지하다 ‘신증동국여지승람’이 편찬되는 1530년 이전 어느 시점에 무너져 흔적만 남았던 것으로 추정된다.

↑↑ 월정교 야경. <사진제공=경주시>

◆고대 교량건축의 백미 만나다
월성 서쪽 끄트머리 서문 터를 빠져나와 만나게 되는 월정교는 최근까지 남아있던 다리의 흔적을 토대로 2018년 새로 지은 것이다. 폭 9m, 길이 66m, 높이 9m 규모로, 다리 위에 지붕을 씌운 형태로 만들어졌다.

월정교 복원·정비 사업은 1975년 교각·교대 실측조사와 1984년 석재조사, 1986년 발굴조사 등 관련 조사와 학술연구가 밑거름이 됐다. 조사 결과 배 모양의 교각이 남아있는 월정교 석교(石橋) 터와 하류 방향으로 19m 떨어진 지점에서 목교 터가 발견됐다. 석교 터는 교대 석축 일부와 4개의 배 모양 교각이 같은 간격으로 남아 있었고, 교각 주위 상류와 하류에 석재들이 넓은 범위로 흩어져 있는 상태였다.

발굴조사에선 누교(樓橋)형태의 교량으로 추정할만한 목조건물 지붕 부재와 기와류, 쇠못과 기와못 등이 출토됐다. 특히 신라시대 연화문과 고려시대 귀목문(鬼目文) 막새가 출토돼 경덕왕 대에 만들어져 고려 때까지 유지됐다는 사실이 확인됐다. 또, 교각 터 사이에선 타다 남은 목재 조각이 수습돼 원성왕 14년의 화재가 실제로 있었다는 사실도 확인됐다.

이후 문화재청과 경주시는 이 같은 결과를 토대로 2008년 5월 복원공사에 들어가 2013년 교각과 누교를 복원하고 2018년 다리 양쪽 끝에 문루(門樓, 아래엔 출입을 위한 문을 내고 위에는 누각을 지어 사방을 두루 살피는 기능을 가진 건물)를 세워 지금의 모습으로 복원했다.

일각에선 “고증 자료도 없이 중국 다리를 참고해 상상력으로 지은 무리한 복원”이라는 주장도 있다. 일부 학자들은 앞에서 소개한 김극기의 시에 ‘홍교’(虹橋, 무지개다리)란 표현에 주목해 당시 월정교가 아치형 다리였을 것으로 추정하기도 한다.

월성과 맞닿은 월정교 북쪽 문루엔 ‘월정교’라고 적힌 현판이 걸려 있다. 통일신라 말기 최고의 문장가로 꼽혔던 고운 최치원(857년~미상)의 글씨다. 사산비명(四山碑銘)으로 불리는 그가 지은 네 개의 비문 가운데 하나인 쌍계사 진감선사대공탑비(雙磎寺眞鑑禪師大空塔碑. 국보 제47호) 글자를 집자(필요한 글자를 찾아 모음)해 만들었다.

건너편 남쪽 문루에도 현판이 있는데, 재미있는 사실은 두 곳 문루의 현판 글씨가 각각 다르다는 점이다. 이곳 문루에 걸린 현판 글씨는 통일신라시대 신필(神筆)로 추앙받았던 김생(711년∼미상)의 것이다. 태사자 낭공대사 백월서운탑비(太子朗空大師白月栖韻塔碑, 보물 제1877호) 글자를 집자했다.

남쪽 문루 현판의 ‘月’(월)자가 이채롭다. 각기 다른 곳에서 글자를 따왔지만, 마치 월정교에 걸릴 것을 예상이나 한 듯 ‘월’자는 배 모양의 교각 단면을 꼭 닮아 다시 한 번 눈이 가게 만든다.

↑↑ 월정교 야경. <사진제공=경주시>

◆남천 따라 흐르는 유구한 신라 역사
월정교 아래로 흐르는 남천(南川)은 토함산 서북쪽 계곡에서 발원해 불국동~평동~남산동~탑정동~사정동을 거쳐 형산강으로 합류하는 하천이다. 문천(蚊川), 사천(沙川), 황천(荒川)이라고도 하는데, ‘삼국사기’와 ‘삼국유사’엔 ‘문천’으로 기록돼 있다. 순우리말 이름인 ‘모그내’를 한자의 뜻을 따서 표기한 것이다.

예부터 경주에는 8가지의 괴이한 현상이 있었다고 하는데 그 중 하나가 ‘문천도사’(蚊川倒沙)다. ‘문천의 모래는 강물을 거슬러 올라간다’는 의미다. 물은 하류로 흘러가는데 모래는 거꾸로 상류에 쌓인다는 사실은 문천에 그만큼 모래가 많았다는 의미다. 사천(沙川)이란 이름도 남천의 강바닥이 주로 모래로만 이루어졌기 때문에 붙은 것이라고 한다.

남천 주변엔 월성과 월정교, 일정교 등 신라 궁궐과 관련한 다양한 유적이 있다. 하천 남쪽으로는 남산과 도당산, 오릉, 영묘사, 천관사 등 여러 사찰이 있다. 이러한 점으로 미뤄 학계는 남천이 신라 왕경과도 깊은 관련이 있었을 것으로 추정한다.

그 때문인지 월성을 둘러싼 세 하천 가운데 문천에 특히 다리가 많이 놓였다. 월정교와 일정교 외에도 효불효교(孝不孝橋), 유교(楡橋), 대교(大橋), 남정교(南亭橋), 귀교(鬼橋) 등 기록에서 확인되는 다리의 수만 해도 상당하다. 왕경의 중심부와 남산이 신라 왕경인들의 주된 생활공간이었기 때문에, 그 사이를 흐르는 문천에 많은 다리가 놓였던 것으로 추정된다는 게 국립경주문화재연구소 측 설명이다.

김운 역사여행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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