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궁과 월지(下)-월지와 동궁 조성, 왕실 권위 다지려는 문무왕의 노림수

경주신문 기자 / 2022년 09월 22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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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경주 동궁과 월지 연못 전경(촬영년도 2015년). <사진제공=문화재청>

“14년(문무왕 14년, 674) … 2월 궁궐 안에 연못을 파고 산을 만들어 화초를 심었으며 진기한 날짐승과 기이한 짐승을 길렀다”

‘삼국사기’ 신라본기 문무왕조에 등장하는 기록이다. 이 기사의 ‘연못’이 바로 월지다. 679년(문무왕 19년) 안압지에 동궁을 지었다는 기록도 나온다. 두 곳 모두 문무왕 재위 시절 지어졌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동궁과 월지의 성격을 파악할 수 있는 기록도 여러 차례 등장한다.
△임해전에서 군신들에게 연회를 베풀었다(효소왕 6년 9월, 697)
△동궁아를 설치하고 상대사 1인, 차대사 1인을 두었다(경덕왕 11년 8월, 752)
△동복 아우 수종을 부군으로 삼고 월지궁에 들였다(헌덕왕 14년 1월, 822)
△임해전에서 군신들에게 연회를 베풀어 주연이 무르익자 왕이 거문고를 타고 좌우에서 노래를 부르며 매우 즐겁게 놀고 파하였다(헌강왕 7년 3월, 881년)
 △고려 태조가 기병 50여명을 거느리고 수도 근방에 이르러 만나기를 요청하였다. 왕이 백관과 더불어 교외로 나와 맞이하고 궁으로 들어와 마주 대하며 정성을 다하여 극진히 예우하고 임해전에 모셔 연회를 베풀었다(경순왕 5년 2월, 931) 등의 기록이 대표적이다.

이처럼 동궁과 월지는 나라의 경사를 축하하며 외국의 사신들을 영접하는 연회장이자 태자의 공간이었다.

◆문무왕에게 왕권 강화는 ‘숙명’
동궁을 지은 679년은 당나라와의 전쟁을 승리로 마무리한 뒤였지만, 월지를 조성한 674년은 아직 나당 전쟁이 끝나기 전이었다. 이 1년 동안 대규모 전투는 없었다 하더라도, 이듬해 신라의 당에 대한 항쟁이 절정에 이르렀던 것으로 미뤄보면 하루하루가 급박한 형세를 이루고 전쟁이 어떻게 될지 모르는 긴박한 상황이었을 것으로 짐작된다.

그렇다면 문무왕은 왜 하필 이 시기에 월지를 조성한 것일까 하는 의문이 생긴다. 그 의문은 674년 이전인 고구려 멸망을 즈음해 ‘왕권 강화’에 골몰하던 문무왕의 명으로 인공 연못을 조성하기 시작했고, 나당 전쟁 중이던 674년 완성됐다고 생각하면 어느 정도 설득력이 생긴다. 5년 뒤 조성된 동궁 또한 월지 건설 단계에서부터 함께 지어질 것으로 계획됐다고 생각해볼 수도 있다.

문무왕에게 ‘왕권 강화’는 숙명 같은 것이었을지도 모른다. 그 숙명은 아버지 김춘추(무열왕)의 즉위에서 비롯됐을 것이다. 654년 진덕여왕이 죽자 귀족회의에서는 상대등 알천을 왕으로 추대했으나, 비담의 난 이후 정치적 실권을 장악하고 있던 김춘추·김유신 연합세력에 의해 김춘추가 왕위에 올랐다.

이는 당시 신라에서 획기적 사건이었다. 그는 폐위된 진지왕의 손자였고, 성골 출신인 기존 왕과는 달리 진골 출신으로 왕위에 오른 최초의 인물이었기 때문이다. 이런 이유로 무열왕은 자신의 즉위를 둘러싸고 야기된 진골귀족들의 불만을 회유하면서 정치적 안정을 도모해야만 했다.

무열왕이 백제를 멸한 이듬해인 661년 사망한 이후 즉위한 문무왕 또한 아버지 대와 같은 고민이 있었다. 안으로는 왕권을 계승·발전시켜야 했고, 밖으로는 고구려와 당에 대한 어떤 입장을 선택할 것인가 하는 게 당면 과제였다.

문무왕은 이러한 난제를 해결하기 위해 일찍부터 외교적·군사적으로 상당히 활발한 활동을 했다. 그 결과 668년 고구려를 멸하며 삼국 간의 전쟁을 종식시켰고, 676년엔 백제·고구려 평정을 위해 일시적 동맹을 맺었던 당의 세력도 축출했다. 또 자신의 세력 기반인 무열왕계와 김유신계를 적절히 활용하면서 권력의 외연을 넓혀갔다.

↑↑ 경주 동궁과 월지 전경. <사진제공=문화재청>

◆월지·동궁 조성 통해 왕실 권위 기틀 다져
이런 상황 속에서 문무왕은 왕실 권위의 기틀을 다지기 위해 월지와 동궁을 조성한 것이다. 특히 문무왕에게 있어서 동궁을 짓는 것은 왕위계승을 위한 매우 중요한 사업이었을 것이다.

‘삼국사기’는 29대 무열왕에서 36대 혜공왕까지를 중대(中代)로 구분했다. 이 시기 왕위계승 원칙은 재위 중인 왕의 장자를 태자로 삼아 왕위를 전달하는 것이었다. 성골왕 시기 왕위계승이 왕과 그 형제의 가족이라는 확대가족에서 이뤄진 것과는 큰 차이를 보이는 대목이다.

문무왕은 신라 역사상 태자로 책봉돼 처음으로 왕위에 오른 인물이다. 무열왕은 즉위 2년째 법민(문무왕)을 태자로 책봉했다. 문무왕도 즉위 5년이 되던 해에 신문왕을 태자로 책봉한다. 다만 32대 효소왕과 34대 효성왕은 아들이 없어 각각 동생에게 왕위를 전했으나 장자상속이라는 원칙에는 변함이 없었다.

태자 책봉은 왕위계승 문제로 빚어질지 모를 우려를 미리 차단하려는 의도가 컸다. 왕이 갖춰야 할 자질과 능력을 미리 함양시키려는 뜻도 있었다.

그런 의미에서 태자궁인 동궁은 없어서는 안 될 것이었다. 신라의 동궁은 태자의 거처뿐만 아니라 태자의 교육기관 역할도 했을 것으로 보는 시각이 많다. 그러나 한편에선 문헌 속 임해전에서 펼쳐진 많은 횟수의 주연(酒宴)을 예로 들며 태자 교육기관 내에 연회를 베풀던 임해전이 위치한다는 것에 의문을 표하기도 한다. 다시 말해 외국의 사신 접대나 연회가 펼쳐지는 전각이 있는 곳에 태자의 교육기관이 있는 것이 어색하다는 것이다.

동궁의 위치에 대해서도 의견은 엇갈린다. 월지 서편 건물지와 동편 영역을 포함한 곳을 동궁으로 보기도 하고, 월지의 동편을 동궁, 월지 서편을 월지궁으로 추정하기도 한다. 그밖에도 국립경주박물관 남측을 동궁으로 보는 견해가 기존에 있었고, 최근엔 월지 서편이 동궁이라는 주장도 제기됐다.

이렇듯 연구자마다 다양한 학설을 제시하고 있지만 확실한 것은 없다. 다만 월지 주변에서 확인되는 동궁 관련 유물, 문헌에서 확인되는 동궁관(東宮官) 기구(機構)속에 월지 관련 관청명 등으로 볼 때 월지 주변에 동궁이 있었던 것은 큰 이견이 없는 분위기다.

주보돈 경북대 명예교수는 “어찌됐건 동궁을 따로 세운 것은 왕위계승 준비를 위한 예비 조치로 이해할 수 있다. 문무왕이 순조롭게 왕위를 이어가기 위해 얼마나 고심했는가를 보여주는 대표적 사례”라고 말했다.

김운 역사여행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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