월성, 800여년 이어온 신라 왕궁

경주신문 기자 / 2022년 08월 25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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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경주 월성 전경. <사진제공=문화재청>

외로운 성은 약간 굽어
반달을 닮고
(孤城微彎像半月)

가시덤불은 다람쥐 굴을
반이나 가렸네
(荆棘半掩猩㹳穴)

곡령의 푸른 솔은
기운이 넘쳐나는데
(鵠嶺靑松氣鬱蔥)

계림의 누른 잎은 가을이라
쓸쓸하네
(鷄林黃葉秋蕭瑟)

태아검 자루를
거꾸로 잡은 뒤로부터
(自從大阿倒柄後)

중원의 사슴은
누구 손에 죽었던가
(中原鹿死何人手)

강가 여인들
부질없이 옥수화를 전하고
(江女空傳玉樹花)

봄바람은 얼마나
금제의 버들을 흔들었나
(春風幾拂金堤柳)

고려 후기 문신 이인로(李仁老, 1152~1220)가 쓴 ‘반월성’(半月城)이란 시다. 이인로가 노래한 반월성은 우리에게 ‘월성’(月城)이란 이름으로 널리 알려진 신라의 왕궁 터다.

◆왕궁 있던 궁성…초승달 닮아 ‘반월성’으로도 불려
월성은 경주 시내 남쪽 남천(옛 이름은 문천) 가에 있는 토성이다. 101년 성을 쌓은 이후 신라가 멸망(935)할 때까지 843년 동안 신라의 왕성이었다. 모양이 초승달처럼 생겨 반월성(半月城)이라고도 불렸고, 왕이 계신 곳이란 뜻에서 재성(在城)이라고도 했다.

규모는 동서 890m, 남북 260m, 내부 면적은 20만7000여㎡(6만2000여평) 정도다. 성벽 전체 길이는 1841m, 성벽 높이는 10~18m 정도로 일정하지 않다. 남쪽은 월성 남쪽을 감아 돌며 자연적인 해자(垓子, 성벽에 접근하는 것을 막기 위해 물을 채운 방어시설) 역할을 하는 남천이 흐르고 자연절벽이 있는 곳이라 일부 구간을 제외하고는 성벽이 없었던 것으로 학계는 추정한다.

지금은 조선시대에 쌓은 석빙고만 남아 있다. 아래 두 기사는 ‘삼국사기’에 등장하는 월성의 축성과 수리에 관한 이야기다.

파사이사금 22년(101년) 금성 동남쪽에 성을 쌓아 월성이라 했다. 둘레가 1천23보였다. 소지마립간 9년(487년) 월성을 수리했다.

‘삼국사기’와 ‘삼국유사’에 따르면 월성은 원래 왜에서 건너온 호공(瓠公)이 살던 집이었는데, 탈해가 호공을 몰아내고 집을 차지했다. 이후 파사이사금 때에 월성을 쌓았다고 한다.

초창기의 신라의 왕궁은 시조 혁거세 때 쌓은 금성(金城)과 파사왕 때 쌓은 월성, 두 곳이었다. 6세기가 되면 금성은 기록에서 사라지는데, 이후 왕궁은 월성과 그 일대만 가리키게 됐다는 게 국립경주문화재연구소 측 설명이다.

↑↑ 경주 월성 전경. <사진제공=문화재청>

◆서서히 베일 벗는 1천년 신라 역사
월성은 1천년에 걸쳐 만들어지고 변화된 왕궁이었던 만큼, 발굴조사도 오랜 기간 이어져왔다.
일제강점기였던 1915년 일본 고고학자 도리이 류조(鳥居龍藏)의 발굴조사를 시작으로 1979∼1980년 문화재관리국 경주고적발굴조사단이 동문 터를 조사해 해자 유구를 찾아냈다. 1985년부터는 해자와 계림 북쪽 건물터, 첨성대 남쪽 건물터, 월성 북서편 건물터 등을 확인했다. 2014년부터는 국립경주문화재연구소를 통해 월성 내부와 성벽, 해자 등 전체 구역에 대한 본격적인 발굴조사가 이뤄지고 있다.
국립경주문화재연구소는 반달 모양인 월성을 서쪽부터 순서대로 A∼D지구로 나누고, A지구와 월성 내부인 C지구를 먼저 발굴했다.

C지구에서는 땅을 3m 정도 파 내려가는 탐색조사를 통해 현재 지표 아래에 통일신라시대 문화층 2개와 신라시대 문화층 5개가 있다는 사실을 확인하고, 8세기 관청으로 추정되는 많은 건물터 유적을 찾아냈다.

A지구 서쪽 문터 유적에서는 5세기에 묻은 것으로 보이는 키 160㎝ 안팎 인골 2구와 토기 4점이 발견됐다. 이 유골은 신라가 사람을 제물로 바치고 그 위에 성벽을 조성한 인신공희 사례일 가능성이 있다는 점에서 화제를 모았다.

또 월성 북쪽에 길쭉한 띠 모양으로 조성한 해자에서는 글자를 쓴 묵서 목간과 수많은 식물 씨앗, 동물 뼈가 나왔다.

A지구와 B지구 북쪽에 있는 1호 해자에서는 4세기 중반에서 5세기 초반에 제작한 것으로 추정되는 나무 방패 2점과 40㎝ 길이의 배 모형이 출토됐다.
 
특히 방패의 경우 고대 방패는 실물이 거의 남아있지 않은데, 월성 출토품은 제작 시기 또한 이르고 형태가 복원이 가능할 정도로 온전하다는 점에서 이목을 끌었다. 의례용으로 보이는 배 모형도 국내에서 확인된 동종 유물 중에서 가장 오래된 것으로 실제 배처럼 선수와 선미를 정교하게 표현했다.

단양 신라 적성비(국보 제198호)에 나오는 지방관 명칭인 ‘당주’(幢主)라는 글자를 기록한 목간도 해자에서 나왔다. 내용은 당주가 음력 1월 17일 곡물과 관련된 사건을 보고하거나 들은 것으로, 벼·조·피·콩 등의 곡물이 차례로 등장하고 그 부피를 일(壹), 삼(參), 팔(捌)과 같은 갖은자(같은 뜻을 가진 한자보다 획이 많은 글자로, 금액이나 수량에 숫자 변경을 막기 위해 사용)로 적었다.

신라의 갖은자 사용 문화가 통일 이전부터 있었음을 엿볼 수 있는 중요한 자료로 평가됐다. 이전 갖은자가 등장하는 가장 오래된 유물은 ‘동궁과 월지’에서 나온 목간(7~8세기)이었다.

↑↑ 국립경주문화재연구소가 발굴조사로 추정 복원해 그린 월성해자 주변 모습. <사진제공=문화재청>

◆‘5세기 어느 여름날 경주’ 모습 되찾다
월성에선 그밖에도 씨앗과 열매 63종, 생후 6개월 안팎의 어린 멧돼지 뼈 26개체, 곰 뼈 15점 등 신라인의 생활상을 유추할 수 있는 출토품도 여럿 나왔다. 이에 따라 국립경주문화재연구소는 월성 발굴을 통해 역사적 사실뿐만 아니라 과거 사람들이 생활했던 환경을 밝혀내는 ‘고환경 연구’도 함께 진행하고 있다. 국립경주문화재연구소는 이것을 ‘경관 복원’이라고 말한다. 이를테면 이런 식이다.

내물마립간(재위 356~402) 무렵 신라가 고대국가로 발돋움하던 5세기초 8월 여름날의 경주. 월성 주변 해자 안에는 가시연꽃과 다른 수생식물이 자라고 있다. 연못 주변은 풀이 자라 시야가 비교적 확 트인 공간이다. 계림과 소하천인 발천 일대에는 느티나무가 싱그러운 녹음을 펼치고 있다. 조금 멀리 떨어진 곳에는 참나무와 소나무 숲이 늘어서 있다. 해자에서는 신라의 국운왕성을 기원하는 행사가 벌어지고 있다. 행사 의장용으로 세운 방패가 늘어서 있은 가운데 소원을 담아 불에 태운 ‘미니어처’ 배가 동동 떠간다. 월성에서는 인근 지역의 지방관인 당주는 곡물수확과 관련된 사건이 일어났음을 보고하고 있다. 당주는 곡물의 숫자를 정확하게 하려고 위·변조하기 쉬운 일(一)과 이(二) 대신 일(壹)과 이(貳)라 쓴 보고서를 제출하고 있다.

인근 공방에서는 수정 원석으로 화려하고 정교한 수정장신구를 만들고, 그 한편에서는 우리에서 키운 맛좋은 6개월 산 어린 돼지를 잡는다.

지금까지 발굴을 통해 얻은 자료를 토대로 국립경주문화재연구소가 복원한 ‘5세기 어느 여름날 경주’의 모습이다.


김운 역사여행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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