첨성대는 정말 별을 관찰한 천문대였을까

경주신문 기자 / 2022년 07월 21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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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국보 제31호 첨성대 전경. <사진제공=문화재청>.

첨성대는 월성 안에
우뚝이 서 있고
(瞻星臺兀月城中)

옥피리 소리
그 옛날 교화 머금었네
(玉笛聲含萬古風)

문물은 시절 따라
신라 때와 달라도
(文物隨時羅代異)

아! 산수만은
예나 지금이나 한가지네
(嗚呼山水古今同)

고려 말 문신 정몽주(1337~1392)가 쓴 ‘첨성대’(瞻星臺)란 시다. 정몽주의 두 아들이 아버지의 글을 모아 펴낸 문집 포은집(圃隱集)에 실려 있다. 정몽주는 선죽교에서 이방원의 수하에게 암살당하기 전 언제인가 경주를 다녀갔었던 듯하다. 첨성대를 마주한 그는 신라의 쇠망이 남의 일 같지 않음에 한숨처럼 슬픔을 읊는다.

◆1400년 이어진 첨성대 미스터리
첨성대는 1400년 전인 신라 선덕여왕(재위 632∼647년) 때 만들어졌다. 첨성대가 세워지고 난 뒤 600년이 지나서 편찬된 ‘삼국유사’에 처음 첨성대에 대한 기록이 나오는데, ‘돌을 다듬어 첨성대를 만들었다’(鍊石築瞻星臺)는 내용이 전부다.

이후 첨성대는 ‘별을 우러러본다’는 뜻의 ‘첨성’이란 이름을 통해 ‘천문대’로 인식됐고, 고려와 조선을 거쳐 지금까지도 그렇게 받아들여지고 있다. 조선시대인 1530년 편찬된 ‘신증동국여지승람’은 첨성대에 대해 “사람이 오르내리면서 천문을 관측했다”고 설명하고 있고, 정조 때 실학자 안정복(1721~1791)은 ‘동사강목’을 통해 “사람들이 가운데를 통하여 오르내리면서 천문을 관측하였다”고 기록하고 있다. 현재 문화재청의 국보 제31호 첨성대 설명문도 “천체의 움직임을 관찰하던 신라시대의 천문관측대”로 소개하고 있다.

그렇다면 첨성대는 정말 천체를 관측하는 곳이었을까. 첨성대의 건축 구조를 곰곰이 따져보면 천문관측소라고 하기엔 이해되지 않는 구석이 너무 많다. 조선시대 몇몇 유학자들도 불평을 했을 정도였다.
신라의 옛것은 산만 남은 줄 알았는데/ 뜻밖에 첨성대가 있음을 몰랐구나/ 선기옥형(고대의 천문관측기구)으로 정치를 한 것은 먼 옛날부터인데/ 이 제작은 황당하여 어디에 쓸까나

조선시대 성종 때 유학자인 김종직(1431~1492)은 ‘첨성대’란 시에서 첨성대에 대해 ‘제작이 황당하다’고 묘사했다. 숙종 때 영의정을 지낸 김수흥(1620~1690)도 ‘퇴우당집’에 첨성대의 구조를 묘사하면서 기묘하다고 했다.

첨성대 몸체는 원형이며, 회오리 병처럼 생겼다. 높이는 수십척이며, 허리 중간에 문이 나 있다. 땅에서 문까지는 사다리를 타야만 올라갈 수 있다. 그 문에서 위쪽은 안이 비어 있는데, 더위잡아야만 올라갈 수 있다. 정상까지는 수직이다. 제도의 기묘함이 그지없다.

이 같은 논란은 아직도 ‘진행형’이다. 지금까지도 학계에선 그 실체를 놓고 갑론을박이 이어지고 있다.

↑↑ 과거 한 시점의 첨성대 전경. <사진=경주신문 DB>.

◆수미산설·우물설 등 다양한 주장 제기
첨성대에 대한 논란은 ‘첨성대가 별을 관측하기 위해 만들어졌다면 이렇게 불편하게 제작된 이유는 무엇인가’란 의문에서 출발한다. 의문점은 크게 세 가지로 요약된다.

첫째는 첨성대 중앙에 있는 가로세로 0.9m 규모의 ‘창’의 위치다. 첨성대 꼭대기에서 별을 바라보려고 했다면, 입구를 아래쪽에 두고 그 안쪽으로 계단을 설치하는 게 훨씬 편했을 것이다. 그러나 지상엔 첨성대 내부로 향하는 문이 없다. 따라서 관측자는 지상에서 사다리를 타고 3.76m를 올라가서 몸을 구부려 좁은 창으로 진입한 뒤, 다시 사다리를 타고 3.38m 위의 꼭대기로 올라가야 한다.

둘째로는 그렇게 올라간 첨성대 꼭대기도 관측을 하기엔 불편해 보인다는 점이다. 우물 정(井)자 모양의 정자석으로 난간을 치고 남은 공간은 가로세로가 각각 2.2m로 좁다. 바닥은 판석으로 덮어두어 내부에서 올라와 닫을 수 있게 해두었는데, 혼천의 등 천문관측 기기를 설치하고 두 사람이 일을 하기에도 불편했을 것이다.

게다가 정자석 등 첨성대 구조물은 특정한 방위를 가리키지 않고 있다. 이를테면 정자석이 각각 동서남북을 가리키고 있다면, 관측자는 좀 더 쉽게 관측을 수행할 수 있을 것이라는 게 ‘천문대 설’에 대한 반론의 핵심이다.

이런 의문으로 인해 첨성대는 근대 학계의 최대 논쟁거리로 부상했다. 1973년 한국과학사학회가 주최한 제1차 첨성대 토론회, 1979년 소백산 천체관측소에서 진행된 제2차 토론회, 1981년 경주에서 개최된 제3차 토론회 등이 이어졌고, 다양한 주장이 제기됐다. 태양에 비치는 첨성대의 그림자로 시간과 절기를 측정했다는 규표설, 중국의 천문서인 ‘주비산경’의 원리에 따라 수학적 원리와 천문현상의 숫자를 형상화했다는 주비산경설, 불교의 수미산을 형상화한 상징적 건축물이라는 수미산설, 최상부에 우물 정(井)자 형태 돌을 얹었다는 점에서 우물의 상징이 투영된 우물설 등이 대표적이다.

반면, 천문대를 고수한 학자들은 첨성대 건립 이후 ‘삼국사기’에서 신라의 천문 기록이 네 배 이상 늘어난 점, 특히 행성에 관한 기록이 눈에 띄게 증가한 점을 내세웠다.
 
최대 쟁점인 중앙 창의 위치에 대해서는 별을 관측하는 밤에 사나운 들짐승으로부터 관측자의 안전을 지키기 위한 설계였다는 가설도 나왔다.

↑↑ 위에서 내려다본 첨성대 모습. 상부의 흰 줄은 국립문화재연구소가 첨성대의 기울기 등을 측정하기 위해 설치한 관측기구다. <사진제공=문화재청>.

◆하늘과 관련된 포괄적인 의미의 건축물
최근엔 첨성대가 ‘현대적인 의미’ 혹은 ‘본격적인 의미’의 천문대는 아니었을 것이라는 데에 서로 다른 입장을 가진 학자들 사이에서도 암묵적으로 동의하는 분위기다. 요약하자면 ‘첨’(瞻)이라는 한자엔 ‘앙망’의 뜻이 내포돼 있는 만큼, ‘첨성’의 의미를 ‘별을 관측하는’ 곳이 아닌 ‘별을 숭모하는’ 곳 정도로 해석하는 게 합리적이라는 것이다.

한국학호남진흥원 서금석 박사는 최근 첨성대 해석과 관련한 지금까지의 다양한 주장을 분석했다. 그는 모든 이설이 천체 관측과 관련된 천문대설을 완벽히 부정하지는 않았다고 분석하면서 “첨성대는 천문대뿐만 아니라 다른 기능도 수행한 다목적 공간이었을 것”이라며 “별을 보는 첨성(瞻星)뿐만 아니라 점을 치는 점성(占星) 등의 역할도 했다고 본다”고 말했다.

사실 첨성대가 축조되었던 시절엔 천문·정치·종교·제의·농업은 서로 분리된 게 아니었다. 태양과 별은 절대 신성의 존재였고 그것을 우러르는 것이 정치적·종교적·문화적 제의의 요체였다. 그렇다 보니 천문 관측은 농경이나 종교, 신앙과 밀접했을 것이다. 이 같은 천문관을 염두에 둔다면, 우리가 상상하는 ‘현대적인 의미’의 천문대, 다시 말해 관측기구를 만들어놓고 사람이 올라가 하늘을 관측했느냐 아니냐가 크게 중요하지 않다는 결론에 이른다.

결국 신라 첨성대는 하늘과 관련된 포괄적인 의미의 건축물, 넓은 의미의 천문대가 아니었을까.


김운 역사여행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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