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인식 시인의 경주인문학산책] 옥룡암과 이육사(1)

경주신문 기자 / 2022년 07월 14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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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육사가 1941년 북경으로 떠나기 전 친우들과 사촌들에게 나누어준 자신의 사진. <사진=이육사 문학관.>

내 고장 칠월은
청포도가 익어가는 시절
이 마을 전설이 주저리주저리 열리고
먼데 하늘이 꿈꾸며 알알이 들어와 박혀
하늘 밑 푸른 바다가 가슴을 열고
흰 돛단배가 곱게 밀려서 오면
내가 바라는 손님은 고달픈 몸으로
청포(靑袍)를 입고 찾아온다고 했으니
내 그를 맞아 이 포도를 따먹으면
두 손은 함뿍 적셔도 좋으련
아이야 우리 식탁엔 은쟁반에
하이얀 모시수건을 마련해두렴
-이육사의 시 ‘청포도’ 전문


7월이면 제일 먼저 이육사(1904~1944)의 시 ‘청포도’가 떠오른다. 조국 광복을 염원하는 마음이 담긴 이 시는 교과서에도 실려있다. 한국인이라면 누구나 좋아하는 국민 애송시이다.

수인번호 264가 시인의 이름이 된 독립투사 저항시인 이육사의 대표시 ‘청포도’가 태어날 수 있었던 창작의 공간이 경주 남산 탑곡 옥룡암이라는 것은 이미 잘 알려진 사실이다.

포항 동해면 삼륜 포도원을 방문하고 시상(詩想)을 얻었지만, 고뇌를 보태어 시를 가다듬어 빛나는 시로 태어나게 만든 곳이 옥룡암이다. 이육사의 유일한 혈육인 딸 이옥비 여사도 부친의 작품 가운데 ‘청포도’를 제일 좋아하는 것으로 알고 있다.

↑↑ 이육사가 1936년과 1942년 두 차례에 걸쳐 머물며 요양했던 옥룡암.

육사는 1936년(32세)과 1942년(38세) 두 차례에 걸쳐 옥룡암에 내려와 요사체인 삼소헌(三笑軒)에 머물며 요양했다. 당시 이곳에서 교류하던 지역의 인물로 고암 박곤복, 김범부, 최영, 수봉재단 설립자인 이규인 등을 들 수 있는데 특히, 이규인 선생의 심부름갔던 이식우(전 경주고 교장) 선생은 청포도 원고를 앞에 두고 고뇌에 찬 육사의 모습을 목격하였다고 한다. 이후 ‘청포도’는 1939년 8월 <문장>지에 공식적으로 발표되었다.

옥룡암은 예전에 신인사지(神印寺址), 불무사(佛無寺)로 불리워 왔던 자리에 다시 세운 작은 절이다. 절 위쪽에는 보물 제201호 탑곡 마애불상군이 있다. 바위에 새겨진 탑은 황룡사 9층 탑의 형태를 유추해 볼 수 있다. 바위 동서남북에 불상과 비를 피하기 위해 설치한 전각의 흔적도 찾아볼 수 있다.
 
↑↑ 옥룡암 위쪽에는 보물 제201호 탑곡 마애불상군이 있다.

이육사는 이곳에 머물며 몇 걸음 떨어진 인근의 감실 부처, 보리사, 서출지 등도 산책 삼아 둘러보았을 것이다. 이육사가 옥룡암에 머물며 쓴 작품들은 많지 않다. 정확하지도 않지만 몇몇 작품에서 흔적을 찾아볼 수 있다. 신석초에게 보내는 1936년 8월 4일자 엽서 속에는 이육사의 지치고 고단함을 엿볼 수가 시조가 있다. 비록 제목은 없지만 이육사의 유일무이한 시조 작품이다.


↑↑ 1936년 8월 4일 신석초에게 보낸 이육사의 엽서. <사진=이육사 문학관.>


비올가 바란마음 그마음 지난 바램
하로가 열흘같이 기약도 아득해라
바라다 지친이넋을 잠재올가하노라
잠조차 업는 밤에 燭태워 안젓으니
리별에 病든몸이 나을길 없오매라
저달 상기보고가오니 때로 볼가 하노라
-1936년 8월 4일자 엽서



이후 이육사는 벗들과 함께 찍은 사진에서 알 수 있듯 1938년 가을 최용, 신석초등과 경주여행을 하였다. 같은 해 11월에는 신석초와 함께 부여를 여행하기도 했다. 이육사는 경주 옥룡암 머물며 이곳에서의 생활과 심정을 절친 신석초에게 보낸 엽서에서 자세히 엿볼 수 있다.


석초형!‘내가 지금 있는 곳은 경주읍에서 불국사로 가는 도중의 십리허에 있는 엣날 신라가 번성할 때 신인사의 고지에 있는 조그만 암자이다. 마침 접동새가 울고가면 내 생활도 한층 화려해질 수 있다해서 군이 먼저 편지라도 한 장하여 주리라라고 바래기도 하면서 형의 게으름에 가망이 없어 내 먼저 주제넘게 호소하지 않는가
석초형! 혹 여름에 피서라도 가서 복약이라도 하려면 이곳으로 오려므나 생활비가 저렴하고 사람들이 순박한 것이 천년전이나 같은 듯하다 (중략)
-1942년 8월 10일자 엽서


1942년 8월 10일에 보낸 다보탑 사진엽서에는 신석초를 그리워하며 경주로 피서 삼아 놀러 오라 하기도 하고, 써놓은 시편 있으면 보내 달라고 한다. 본인은 마음이 정리되지 않아 시를 쓸 수 없다는 심정을 전하기도 한다.

>>다음 편에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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