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서전, 평소 써놓은 다양한 ‘장식품’이 필요하다

인생 정리, 시, 수필, 인사글, 평론, 편지…
사람들과 교감한 고 이영만 선생님 ‘흔적’이 보여준 선명한 발자국!!

박근영 기자 / 2022년 07월 07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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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고 이영만 선생님이 쓴 자서전 ‘흔적’.

이번 호에는 자서전을 만드는 다양한 구성에 대해 말해 보겠다. 자서전이라고 하니까 대부분 사람들은 자기를 중심으로 한 일대기라고만 생각하는 경향이 있다. 그러나 자서전에는 생각보다 많은 구성요소들이 포함될 수 있다. 자서전은 자기의 일대기를 쓰는 데 그치지 않고 자신의 내면이 지닌 가치관, 자신만의 문화와 예술, 사회에 대한 나름의 견해, 세상에 내보이고 싶은 문학 작품들 등 다양한 요소들이 펼쳐지는 종합문학서다. 나는 그것을 자서전의 ‘장식품’이라고 말한다.

이런 장식은 자서전을 재미있게 만들 뿐만 아니라 책을 구성하는 시각적 완성도를 위해서라도 상당히 필요한 구성요소다. 내 경우 자서전 출판을 자주 하다 보니 이런 장식품을 인생 자체를 쓰는 것 못지않게 중요하게 배치하는 편이다. 그래서 자서전 내겠다는 분들에게 회고록 자체도 중요하지만 평소에 써 놓은 글이 있는지 꼭 물어보곤 한다.

자서전의 장식품은 자신이 직접 쓴 에세이나 시, 정치·사회적 현상에 대한 평론, 문화 관련 잡기들이 다양하게 들어갈 수 있다. 특히 정치인들의 경우 다양한 정치경력에서 나온 소감들을 쓸 수도 있고 기업인들은 자신의 주요 변곡점에서 일어난 국가의 경제정책이나 기업이 자리잡고 있는 지자체와의 소통 등에 대해서도 쓸 수 있다. 더 정확하게 말하면 ‘쓸 수 있다’가 아니고 그런 장식품들이 자서전의 가치를 높이고 재미와 유익함을 주기도 한다. 독자들은 딱히 남의 일생에는 관심을 가지지 않지만 세상 돌아가는 일에는 민감한 편이어서 적절한 사회 평론에 대해서 오히려 관심 가지는 편이다.

자서전 속에 자신과 소통해온 사람들의 이야기를 쓰거나 그 사람들의 글을 받아 올리는 것도 좋은 방법이다. 특히 그 사람들이 꼭 유명인이 아니라도 자신을 깊이 알고 있거나 특별한 계기로 인연을 맺은 사람이라면 더할 나위 없이 좋다. 특히 그 글들이 평소에 써둔 것이라면 말할나위 없이 좋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대부분의 자서전들은 이런 장식품이 거의 없다. 정치인들은 대충 자신의 인생 이야기를 하다 정치적 업적을 홍보하는데 열 올리고 사업가들 역시 자신의 인생 이야기를 하다 자신이 거둔 경제적 성과를 내세우고 그치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물론 그게 가치 없다거나 그래서 안 된다는 것은 아니다. 정치인이 정치적 업적을 홍보하고 사업가가 자신의 성과를 써내는 것만큼 당연하고 값진 일이 어디 있겠는가? 글이란 것이 말, 상품과 달라서 아무리 좋은 법안을 만들고 아무리 좋은 상품을 만들어도 그것을 효과적으로 표현하는 것은 쉽지 않은 일이다. 현란한 장식품을 달 줄 알았다면 문학을 하지 왜 정치를 하고 사업을 했겠는가?

지금까지 많은 자서전을 펴내면서 그 중에서 기억나는 자서전이 한 권 있다. 어느 시골 도시의 시장이 쓴 자서전인데 여기에는 자신의 삶과 자신의 정치 경력에 포함된 다양한 정책에 대한 이야기, 자신이 평소에 실천하고 있는 가치관에 대한 글, 자신과 소통해온 사람들과의 다양한 이야기들이 녹아 있다. 평소 책 읽기를 좋아하고 사색하며 걷고 철학적 담론을 즐기는 그 시장은 업무능력도 탁월해 그 도시에 많은 변화를 일으켰고 그만큼 하고 싶었던 이야기도 많았을 법했다. 특히 자신의 인생 변곡점마다 중요하게 맞닥뜨린 사람들과의 이야기가 상당히 흥미 있게 전개되어 있어서 정치인들의 뻔한 자서전이라고 생각되지 않을 만큼 알찬 내용을 담고 있었다. 아쉽게도 책을 내면서 이런저런 이유로 그런 이야기들이 뭉텅 잘려 나갔는데 뒤에 책을 볼 때마다 드러낸 그 부분이 아깝게 여겨졌다. 그 좋은 장식품들을 다 빼내고 나니 책이 마치 맨몸에 팬티와 런닝셔츠만 입혀 놓은 듯해 볼 때마다 씁쓸했다.

내가 펴낸 자서전은 아니지만 오래오래 기억하는 멋진 자서전도 한 권 있다. 이 책은 장식품이 단순한 장식품이 아니고 그 자체로 빼대이자 몸의 역할까지 하는 시쳇말로 ‘역대급’으로 아름다운 자서전이다.

이 자서전의 주인공은 안강 출신의 고 이영만 선생님(1927~2013)이다. 선생님은 경주에서 태어나 경주공립중학교(현재 경주중고교)를 나와 국학대학 졸업 후 경주와 대구에서 잠깐 국어 교사를 지내셨다. 6.25전쟁 당시에는 육군 통신 장교로 입대해 참전하셨고 퇴역 후 체신부에 근무, 서울체신청장으로 공직을 마치셨다. 퇴임 후 기업 대표와 한국·스웨덴친선협회 회장 등 다양한 활동을 하셨고 재경경주향우회의 탄생부터 성장에 이르기까지 가장 왕성하게 활동하신 주역으로 많은 존경을 받던 분이시다. 무엇보다 한때 어려움에 빠진 경주중고등학교 서울동창회를 위해 80대 노년임에도 동창회장을 맡아 노심초사하시던 모습과 경주고도보존회에서 고문을 맡아 오래 활동하신 것이 가장 기억에 남는다.
선생님은 80세 되시던 해인 2006년에 ‘흔적’이라는 이름의 자서전을 출간하셨는데 개인적으로 이 자서전만큼 완벽한 자서전을 본 적 없다. 흔적은 본문 530p, 사진을 포함한 기타 내용 80여 p에 사이즈가 무려 46배판(188x257)이나 되는 두껍고 큰 책이다. 이 책을 추천서나 선생님을 회고하는 지인들의 글 일부를 빼면 전부 이영만 선생님이 직접 쓰신 글들로 채워 넣었으니 그 작업량만 해도 엄청나다.

이 책이 잘 되었다고 하는 이유가 있다. 이 책은 선생님이 인생 전반에서 부딪치며 그때그때 써놓은 글들을 모아서 쓴 것이기에 현장감이 남다르다. 그게 이 책의 뼈대를 이룬다. 선생님은 원고 정리를 얼마나 잘해놓으셨는지 편지와 인사말, 축사, 격려사, 주례사 등 자신이 공식석상에서 하신 말씀들을 순차적으로 정리해 놓으셨다가 각각의 해당 단원에 수록해 놓으셨다. 선생님의 연설은 짧으면서도 굉장히 큰 울림을 가진 것으로 정평 나 있는데 이런 연설문들을 다시 보는 것은 독자로서도 큰 즐거움이다. 여기에 기행문, 시사평, 생활수필 등을 비롯한 글들도 눈에 띈다.

대부분의 자서전들은 형식상 몇 개씩 단원을 가지고 있는데 대개 5~7개쯤이다. 늘이고 싶어도 단원을 나눌 만큼 원고가 되지 않기 때문이다. 그에 비해 흔적은 무려 13개 단원을 가지고 있고 단원들마다 수십 개씩의 소제목들이 배열되어 선생님의 인생을 빛내고 있다. 누가 일부러 마음먹고 쓰려고 한다면 결코 쓸 수 없는 인생의 자서전이자 시대와 시대를 망라한 체신 업무의 발전상을 볼 수 있는 기록물이다.

선생님은 책을 통해 많은 사람들을 등장시켰고 한편으로는 그들이 이 책 속에서 또 다른 회고를 통해 선생님의 이야기를 남기며 소통이 어떤 것인지 보여주고 있어 상투적인 일반적 추천서들과 전혀 다른 느낌이다. 제목은 비록 ‘흔적’이지만, 이런 점들이 자서전을 늘 대하는 내가 ‘자서전의 분명한 발자국’으로 여기는 이유다. 특히 꼭 기억해 둘 가장 중요한 명제. 자서전은 평소 써둔 글로 채우는 것이 제일 좋다는 것이다. 선생님은 떠나셨지만 선생님의 흔적이 있어서 그 큰 빈자리가 조금이나마 채워지는 것이 다행일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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