알영정, 신라 건국 신화의 또 다른 주인공을 만나다

경주신문 기자 / 2022년 06월 23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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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신라 시조 박혁거세의 부인인 알영이 탄생한 곳으로 알려진 알영정.

우물에 나타난
신룡이 낳은 여자 아이
(井現神龍誕女兒)

늙은 할멈이 거두어 길러
왕비가 되어
(老嫗收養作王妃)

하늘이 내린 어진 덕 규중의
법도를 세우니
(天生賢德成閨範)

두 성인이 한마음으로
지극한 정치 펼쳤네
(二聖同心致至治)


조선 중기 학자 성여신(成汝信, 1546~1632)의 시문집인 ‘부사집’(浮査集) 권1에 실린 ‘알영정’(閼英井)이란 시다.

성여신은 남명 조식의 제자로, 임진왜란 이후 문란하고 투박해진 풍속을 바로잡는 데 큰 역할을 했던 인물이다. 글씨와 문장에 뛰어났고 산수유람을 즐겼다고 한다.

역사서를 즐겨 읽어 역사에도 남다른 안목을 지녔던 그는 중년에 경주를 유람한 뒤 이곳의 유적을 소재로 27수의 절구를 남겼다. 그의 작품은 역사를 거울 삼아 현실을 구제하려는 경세사상(經世思想)이 반영된, 17세기 전반 선비들의 역사 인식을 살펴볼 수 있는 사료로 평가받고 있다. 이 시는 그 중 하나다.

◆알영의 탄생 설화 깃든 우물
오릉의 숭덕전(崇德殿) 뒤편에는 담장으로 둘러싸인 비를 세워 놓은 건물이 있고, 건물의 뒤쪽에 알영정이라고 전하는 우물이 있다. 신라 시조 박혁거세의 부인인 알영의 탄생 설화가 깃든 곳이다. 아리영정(娥利英井)이라는 이름으로도 불렀다고 ‘삼국유사’는 전한다.

‘삼국유사’ 기록에 따르면 알영정의 위치는 사량리(沙梁里)에, ‘신증동국여지승람’과 ‘동경잡기’ 기록엔 경주부의 남쪽 5리에 있다고 한다. 18세기 초 박씨 왕들의 무덤이 정해지면서 오릉 내에 있던 우물이 자연스럽게 구전(口傳)되다가 1930년대에 알영정으로 지정되면서 비석과 비각을 건립한 것으로 추정된다는 게 국립경주문화재연구소 측 설명이다.

우물은 길이 200㎝, 너비 50㎝ 내외의 석재 3매로 덮여 있어 전체 규모를 파악하기는 어렵다. 주변엔 옮겨온 것으로 추정되는 팔각형 석재와 주춧돌 등이 남아 있다. 남쪽엔 1931년 세운 ‘신라시조왕비탄강유지비’(新羅始祖王妃誕降遺址碑, 신라 시조의 왕비가 태어난 곳에 세운 비)’가 있고, 그 뒷면엔 비석을 세운 내력이 기록돼 있다.

↑↑ 알영정 비각 내 신라시조왕비탄강유지(新羅始祖王妃誕降遺址)라고 새긴 비석이 있다.

◆용의 옆구리에서 태어난 성인(聖人)
‘삼국사기’와 ‘삼국유사’는 알영의 탄생에 대한 이야기를 다소 다르게 기록하고 있다. 아래는 ‘삼국사기’ 기록이다.

5년(기원전 53년) 봄 정월에 용이 알영정에 나타났다. 용의 오른쪽 옆구리에서 여자아이가 태어났는데, 노구(老軀)가 보고서 기이하게 여겨 거두어 길렀다. 우물의 이름을 따서 아이의 이름을 지었다. 성장하면서 덕행과 용모가 빼어나니, 시조가 그 소식을 듣고 맞아들여 왕비로 삼았다. 행실이 어질고 내조를 잘하여 이때 사람들이 그들을 두 성인(聖人)이라고 일컬었다.

‘삼국유사’도 비슷한 내용을 담고 있다. 다음은 ‘삼국유사’가 전하는 박혁거세와 알영의 탄생 이야기다.
양산(楊山) 아래 나정 옆에서 이상한 기운이 땅에 일고 무릎을 꿇은 흰 말이 있었다. 그곳으로 찾아가 살펴보니 보랏빛 큰 알이 하나 있었다. 말은 사람들을 보자 길게 소리쳐 울다가 하늘로 올라가버렸다. 알을 깨뜨려 보니 사내아이가 나왔는데 생김새가 단정하고 아름다웠다. 모두들 놀라 아이를 동천에서 목욕을 시키니 광채가 나고 새와 짐승이 절로 춤을 추고 천지가 진동하고 해와 달이 밝게 빛났다. 이에 그 아이를 혁거세 왕이라 이름하고…(중략)…이날 사량리(沙梁里)에 있는 알영정에 닭을 닮은 용이 나타나서 왼쪽 옆구리로 어린 여자 아이를 낳았다. 얼굴과 모습이 매우 고우나 입술이 마치 닭의 부리와 같았다. 이에 월성 북쪽 냇물에 목욕을 시켰더니 그 부리가 떨어졌다…(중략)…두 성인(聖人)은 13세가 되자 오봉 원년 갑자(기원전 57년)년에 남자는 왕이 되어 이내 그 여자를 왕후로 삼았다.

두 기록의 가장 큰 차이점은 박혁거세와 알영의 나이다. ‘삼국사기’에서 알영이 태어난 때는 박혁거세가 즉위한 지 5년이 지난 때었다. 박혁거세가 13세에 즉위했다고 하니, 혁거세와 알영의 나이는 18살이나 차이가 난다.

반면, ‘삼국유사’는 박혁거세가 알을 깨고 나온 직후, 같은 날 바로 알영이 태어났다고 기록하고 있다. 이 기록으로 보자면 혁거세와 알영은 동갑내기이고, 이들은 13세가 되던 해 결혼한다.

↑↑ 담장 밖에서 보이는 비각과 알영정.

◆건국 신화의 또 다른 주인공
‘삼국유사’엔 ‘삼국사기’에선 보이지 않던 다음과 같은 기록도 등장한다. 알영의 입술이 마치 닭의 부리 같았으므로, 월성 북천(北川)에 가서 목욕을 시켰더니 부리가 떨어졌다는 내용이다.

이는 신라의 시조 박혁거세의 왕비인 알영을 신성한 존재로 부각하기 위한 작업의 결과로 보인다고 국립경주문화재연구소는 설명한다. 고대기 양대 역사서인 ‘삼국사기’와 ‘삼국유사’ 모두 시조인 혁거세뿐만 아니라 시조비인 알영의 독자적인 탄생담이 실려 있다는 점, 두 역사서 모두 혁거세와 알영을 ‘두 성인’(聖人)으로 기록한 점 등도 이 같은 견해를 뒷받침한다.

건국신화에서 시조왕의 왕비 이야기를 비중 있게 다룬 이유는 신라의 건국과정에서 중요한 상징성을 지니고 있기 때문일 것이다. 특히 독자적인 탄생담이 등장한다는 점에서 알영 역시 신라 형성에 중요한 의미를 가진 유력 집단의 시조 전승으로 보인다는 게 학계의 일반적 견해다.

다만, 구체적인 해석에 있어선 의견이 갈린다. 일부 학자들은 알영의 탄생 설화에서 계룡(鷄龍)이 등장하고 후대 김씨의 시조인 알지의 탄생담에서도 닭이 등장한다는 점에서 알영을 닭 토템을 가진 김씨 부족과 연관된 것으로 판단한다. 반면, 알영 설화는 용 토템에 가까우며 닭 토템을 가진 김씨 세력과 연결하기 어렵다는 견해도 있다.

그밖에 신라 건국신화에서 알영의 독자적인 탄생담이 남아 있다는 점, 알영이라는 이름의 유래가 된 탄생지 알영정이 시조릉으로 전해지는 오릉 권역 내에 위치한 점 등으로 미뤄, 알영은 사로국 단계에서 건국시조로 숭상되었으며, 후대 혁거세를 상징으로 하는 세력이 신라를 장악하면서 혁거세를 시조왕으로 알영은 시조비로 하는 건국신화가 형성된 것으로 보기도 한다.


김운 역사여행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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