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릉-2000년 전, 신라 시조 박혁거세가 잠든 땅

경주신문 기자 / 2022년 06월 09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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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5기의 봉분이 있는 오릉의 항공사진. <경주시 관광자원 영상이미지>



울창한 고목에
저녁안개 짙어지고
古木森森夕霧冥

혁거세의 묘소 흙 만두 모습이네
赫居遺墓土饅形

지금은 초동이
소를 타고 지나다니며
只今樵牧騎牛過

이끼를 죄다 밟고도
혼령께 빌지 않네
踏盡荒苔不乞靈



조선 중기의 문신 홍성민(洪聖民, 1536~1594)의 시문집 ‘졸옹집’(拙翁集)에 실린 ‘과혁거씨능전’(過赫居氏陵前)이란 시다. 시의 제목은 ‘혁거씨 왕릉 앞을 지나다’란 의미다.

홍성민은 경상감사로 재직하던 1580년과 1581년, 1591년 세 차례 경주를 방문했다고 한다. 그는 경주 일대를 둘러본 내용을 기록으로 남겼는데, 그 기록인 ‘계림록’(雞林錄)엔 반월성과 계림, 첨성대, 봉황대, 금장대, 포석정, 백률사, 분황사, 김유신묘, 오릉, 이견대, 대왕암, 불국사 등을 둘러본 내용이 상세히 담겨 있다. 그의 시문집에도 경주와 관련된 시가 여러 편 등장하는데, 이 또한 경주 방문 시기에 지어졌거나, 이후 그 경험을 바탕으로 쓴 것들이다.

그가 ‘혁거씨능’이라고 표현한 곳은 지금의 ‘오릉’(五陵)이다. 경주 시내 남쪽, 월성 인근에 있는 오릉은 모두 5기의 봉분이 있어 붙여진 이름이다. 신라 건국 시조인 혁거세 거서간과 알영부인, 2대 왕인 남해 차차웅, 3대 유리 이사금, 5대 파사 이사금이 묻혀 있다고 전한다. 모두 초기 박씨 가문 왕들이다.

↑↑ 일제강점기 경주 오릉 모습. <국립중앙박물관 제공>

◆삼국사기‧삼국유사…서로 다른 유래 이야기
4명의 왕과 알영부인이 묻혔다는 근거는 ‘삼국사기’ 기록에 따른 것이다. ‘삼국사기’는 혁거세 거서간과 왕비 알영, 남해 차차웅, 유리 이사금, 파사 이사금 모두 ‘사릉’(蛇陵)에 장사를 지냈다고 기록하고 있다. 사릉은 오릉의 또 다른 이름이다. 사릉(蛇陵)은 장례를 치를 때 큰 뱀이 나타나서 붙은 이름이다. 반면 ‘삼국유사’는 박혁거세의 장례와 관련해 다음과 같이 기록하고 있다.

나라를 다스린 지 61년 되던 어느 날 왕이 하늘로 올라갔는데 7일 뒤에 그 죽은 몸뚱이가 땅에 흩어져 떨어졌다. 그러더니 왕후도 역시 왕을 따라 세상을 떠났다 한다. 나라 사람들은 이들을 합해서 장사 지내려 했으나 큰 뱀이 나타나더니 쫓아다니면서 이를 방해하므로 오체(五體)를 각각 장사 지내어 오릉을 만들고, 또한 능의 이름을 사릉이라고 했다. 담엄사 북릉(北陵)이 바로 이것이다. 그 후 태자 남해왕이 왕위를 계승했다.

‘삼국유사’의 설명대로라면 오릉은 혁거세왕의 단독 무덤이 되고, ‘삼국사기’ 기록으로 보자면 신라 초기 왕가의 능역이 되는 셈이니 완전히 배치되는 해석이다.

어찌됐던 이후 편찬된 각종 지리지는 오릉을 혁거세왕의 무덤으로 기록하고 있다. 조선 후기에 이르기까지, 세상 사람들도 오릉을 혁거세왕의 무덤으로 인식한 듯하다. 조선 후기 실학자 이만부(李萬敷, 1664~1732)가 쓴 ‘동도잡록’(東都雜錄)에 나오는 글이다.

혁거세의 묘는 또한 남쪽의 나무숲 속에 있다. 흙무더기를 살펴보면 사방과 중앙에 다섯 봉분을 만들었는데, 그 형상이 혹은 둥글거나 혹은 길고 혹은 비스듬히 하늘로 올라가 있다.

다음은 조선 영조 때 문신을 지낸 김상정(金相定, 1722~1788)이 1760년 경주의 고적을 둘러보고 쓴 ‘동경방고기’(東京訪古記) 기록이다.

건물 안에는 시조왕의 신위를 봉안하고 있었다. 뜰로 들어가서 비석을 보고는 협문(夾門)을 나와 수백 보를 가니 능(陵)이 있었는데 봉분의 형상이 아주 컸다. 그 수가 5개가 이어져서 마치 방위를 안고서 타원으로 두른 것 같았다. 크기는 같지 않았지만 따질 것은 못 되었다.

김상정이 이 글에서 언급한 ‘건물’은 오릉 남쪽에 있는 숭덕전(崇德殿)이다. 숭덕전은 세종 11년 때인 1429년 지어졌고, 경종 3년인 1723년 숭덕전으로 사액됐다. 영조 27년인 1751년 나라에서 명을 내려 시조왕 위패에 ‘왕’(王)자를 쓰게 하고 묘비를 세우도록 했다. 8년 뒤인 1759엔 우참찬 정익하가 지은 신도비가 세워졌다. 인근엔 알영이 태어났다고 전하는 알영정이 있다.

◆봉분 아래 잠든 신라 건국의 흔적
현재 오릉은 무덤 주인에 대한 논란의 과정을 거쳐 ‘삼국사기’ 기록처럼 혁거세 거서간과 알영왕후, 남해 차차웅, 유리 이사금, 파사 이사금의 무덤으로 규정하고 있다.

오릉은 중앙의 3호분을 중심으로 서쪽엔 1호분, 남쪽엔 2호분, 북쪽엔 4호분, 동쪽엔 5호분이 위치한다. 4기는 봉분이 둥근 원형분이고 1기는 표형분(표주박 모양의 무덤)이다. 내부구조는 돌무지덧널무덤(적석목곽분)으로 추정된다.

그런데 돌무지덧널무덤은 마립간 시대의 대표적 무덤 양식이다. 신라 건국 초기 무덤 양식은 널무덤이나 덧널무덤이다. 이런 이유로 오릉이 신라 초기의 왕릉이 아니라는 견해도 있다.

이와 관련해 연관지어 생각해볼만한 기록이 ‘삼국사기’에 등장한다. “(눌지 마립간) 19년(435년) 2월에 역대 원릉을 수리하였다. 여름 4월에 시조묘에 제사를 지냈다”는 내용이다.

눌지 마립간은 신라 제19대 왕이자 김씨 왕조가 시작된 이후 세 번째 왕이다. 눌지왕 기준으로 선대 군주는 제13대 미추 이사금, 제17대 내물 이사금, 제18대 실성 이사금 3명이다.

이 기록에 대해 상당수 학자들은 “3기 밖에 없는 김씨 선대 왕릉만 수리한 것은 아니었을 것”이라고 본다. 눌지 마립간이 왕권을 강화하면서 박씨 왕들의 무덤도 마립간 시대의 대표적 형태인 돌무지덧널무덤으로 재정비해 오늘날까지 이른 것이 아닐까 하는 견해다.


김운 역사여행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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