삶터에 대한 답사, 내면을 찾아 복원하는 시간여행 !!

무너진 흙담에서 흙 한 줌 흩날리시던 아버지는 그때 어떤 여행을 떠나고 계셨을까?

박근영 기자 / 2022년 06월 02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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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황남동고분, 저 아래로 10여 호를 이룬 작은 동네와 작은 개울 미나리꽝과 포도원이 이야기를 쏟아냈다.

자서전에 있어서 매우 중요한 것이 살아온 곳의 흔적이다. 그것은 대부분 고향이라는 형태로 나타나거니와 대부분의 사람들은 자기 자신이 살던 곳에 대해 진한 향수를 느끼기도 하고 원초적인 귀소본능을 가진다. 특히 고향의식이 강한 우리나라 사람들은 수구초심(首丘初心)이라는 말을 달고 살 만큼 자신이 어린 시절 살던 곳에 대해 애착을 가진다.

그러나 고향이란 것을 막연하게 가슴에 품고 살면서도 막상 고향에 대한 추억을 꺼내 볼라치면 의외로 떠오르는 것이 없다. 분명히 많은 추억들이 있었고 여러 가지 사건들이 있었을 것이지만 무얼 쓰려고 하면 막막해지기 일쑤다.

고향만 그런 것이 아니고 살아온 과정의 온갖 장소들도 그렇다. 추억의 장소임에는 분명하지만 그곳에서 어떤 일이 있었는지를 떠올리기는 쉽지 않다. 살면서 이사를 자주 다닌 사람들이라면 더욱 그렇다. 옮겨다닌 곳마다 분명히 사람들에 대한 기억과 장소에 대한 기억들이 존재할 테지만 사람이건 사건이건 떠올리기 어렵다.

이럴 때 필요한 것이 답사다. 답사라고 하니 거창하게 무슨 유적지나 탐사지를 향해 떠나는 듯하지만 실제로는 그냥 ‘놀러가기’다. 자신이 살았던 곳, 자신이 시간을 보냈던 장소를 찾아 가보면 잊고 있었던 추억들이 불현듯 되살아나는 놀라운 경험을 할 수 있다.

내 경우도 그랬다. ‘니 꼬치 있나?’라는 책을 쓰면서 고향에 갈 때마다 아무 곳이고 한두 곳은 꼭 걸어보았다. 말했다시피 그 책은 교촌을 둘러싸고 그 주변의 고분들, 남천과 반월성, 계림, 최부자댁, 황남초등학교와 남흥시장, 우리 집 앞에서 남천 건너 과수원을 지나면 바로 산이 시작되던 도당산까지 반경 2킬로미터를 거의 벗어나지 않는 이야기로 꾸며졌다. 희한하게 어느 곳으로 가건 이야기가 샘솟듯 기억났다.

이를테면 내가 태어나 살던 황남동 고분 근처로 가면 그 고분을 둘러싸고 있던 미나리꽝이 떠오르고 형의 무릎 사이에 끼어 썰매 타던 생각이며 왕릉을 뒷동산 삼아 전쟁놀이며 숨바꼭질 하던 생각이 술술 떠올랐다. 능을 끼고 돌아서면 구렁이 한 마리를 둘러싸고 형들이 구렁이를 돌로 짓찧어 죽이던 장면이나 죽은 뱀으로 나를 놀려대던 기억이 숭숭 솟아올랐다. 최부자댁으로 가면 비행기에서 삐라를 뿌리고 그걸 주워 딱지를 만들던 친구들이 떠올랐다.

어릴 때 이사 간 교촌 집은 이야기의 보물창고였다. 우물을 보면 그 우물 파던 때 형들이 먹인 막걸리에 골아 떨어진 기억과 판돌이네 집 가게에서 엄마 몰래 외상으로 빠다빵 사먹다 혼난 이야기가 떠올랐다. 이웃한 큰댁으로 가 대문을 열라치면 집 앞에서 늘 나를 괴롭히던 장닭이 후다닥 뛰어나올 것 같은 서늘함이 아직도 느껴졌고 결국 그 닭이 누나가 휘두른 빨랫방망이에 맞아 백숙이 된 이야기가 주마등처럼 스치고 지나갔다. 큰댁 우물가에서는 노랗게 염색한 채 가슴을 다 내놓고 등목하던 요석궁 이모들의 뽀얀 살결에 놀라 꺼벙하니 서 있던 초등 2학년의 내 모습도 떠오른다. 바로 이어 큰마당이라는, 최부자댁 본가 앞 넓은 공터로 이어지고 그곳에 줄줄이 들어오던 대형버스와 그 버스에서 내리던 일본인 관광객들, 그들 앞으로 달려가 조개로 만든 목걸이며 기념품을 팔던 동네 아주머니들의 까맣게 그을은 얼굴들로 이어졌다.

황남초등학교 역시 기억의 보물섬이었다. 교문을 들어서는 순간부터 나는 어느 새 가슴에 손수건을 단 꼬꼬마로 돌아가 교정을 이리저리 쏘다녔고 불과 한 시간쯤만에 여러 학년을 지나 6학년까지 불쑥 자란 내 모습을 발견하고 말할 수 없는 감회를 느꼈다. 불행하게도 거기에는 지나치게 폭력적이었던 선생님들이 곳곳에 도사리고 있어서 섬뜩했지만 그 와중에도 친구들과 오징어며 고래창대기 같은 놀이에 운동회 마쓰게임, 웅변대회, 졸업식까지 웃고 울며 부대끼던 온갖 기억들이 우후죽순처럼 피어올라 나를 즐겁게 했다. 내가 유독 어린 시절 기억을 잘 찾아내는지는 모르겠지만 교정을 돌면서 초등학교 1학년부터 6학년까지 친하게 사귀었던 친구들 이름들이 쏙쏙 떠올라 놀라기도 했다. 내가 이렇게 기억력이 좋았던가 싶었고 혹시 천재 아닌가 하는 착각도 들 정도였다.

이런 기억은 수도 없이 많다. 그 반경 2킬로미터는 지금 다시 가보면 손바닥만큼 좁은 곳이지만 어린 시절의 나에게는 끝에서 끝까지 한 번도 제대로 다녀 보지 못한 엄청나게 넓은 삶의 무대였다. 그러니 그 속에 얼마나 많은 추억들과 얼마나 깊은 사연들이 숨어 있었겠는가? 그게 내 머릿속을 떠나있다가 그곳에 가봄으로써 확연하게 떠오르는 것이었다.

이런 장소에 대한 추억은 비단 나에게만 국한된 것이 아니다. 실제로 자서전을 쓰려는 사람들과 어린 시절 혹은 젊은 시절 살던 곳을 함께 답사해 본 적 있는데 그들은 한결같이 오랜만에 찾은 고향, 오랜만에 방문한 오래전 삶의 장소에서 자신이 까맣게 잊고 있었던 추억을 떠올리며 되찾은 기억에 환호하거나 눈시울을 붉히곤 했다. 신기한 것은 그 장소에 돌아가 보면 이런저런 개발이나 변화의 물결로 인해 실제로 자신이 이전에 살던 곳과 전혀 딴판이 되었는데도 이쯤에는 뭐가 있었고 저쯤에는 뭐가 있었다는 식으로 장소를 기억해내고 그곳에서 겪었던 추억을 떠올리기 일쑤라는 것이다. 이것을 보면 장소 답사는 단순히 기억나는 현장으로 가는 것이 아니고 자신의 내면, 그 깊숙이 숨겨진 시간과 공간과 그곳에 갈무린 된 기억을 찾아 복원하는 시간여행임에 분명하다.

이런 시간여행의 숙연하던 한 장면이 있다. 내가 중학교 1학년 때였다. 그 무렵 내가 태어나 유년기를 보냈던 황남동 고분 아래 십여 호 되는 동네가 유적지 정비사업으로 다 허물어져 있었다. 어느 날 아버지께서 자전거를 타고 가시다 그 동네 앞에서 내려 천천히 우리가 살던 집 앞으로 다가가셨다. 나도 자전거에서 내려 무심코 아버지를 따라 허물어진 집 앞으로 다가갔다.

아버지는 그 허물어진 집 앞에서 한참이나 서서 아무 말씀이 없으셨다. 그러다 가만히 무릎을 구부리고 허리를 숙여 흙 한 줌을 집으시더니 천천히 손가락 사이로 흘려 보내셨다. 마침 바람이 옅게 불며 그 흙들에서 돋아난 먼지를 한쪽으로 날려 보내는데 아버지의 그 뒷모습에서 나도 모르게 무수한 감정들을 읽을 수 있었다. 단언하건데 아버지의 존재가 그렇게 사무치게 내 가슴에 들어온 것은 그때가 처음일 것이다. 그렇다고 아버지의 생각이나 마음을 여쭈어보지도 않았다. 그저 무너진 집과 돌담들을 배경으로 아버지의 뒷모습과 그 바람에 실려 날아가던 뿌우연 먼지들만 지켜보았을 뿐이다.

어쩌면 아버지께서는 그때 당신만의 시간여행을 즐기고 계셨는지도 모른다. 42년 전, 한창 자식들 뒷바라지에 여념이 없으셨던 40대 끝자락의 아버지가 그 무너진, 오래전 삶의 공간에서 복원해 내셨던 추억은 무엇이었을까?

자서전 쓰기를 계획했다면 우선 놀이 삼아서라도 고향을 비롯해 자신이 살아온 삶의 장소들을 천천히 돌아보자. 굳이 억지로 찾으려 애쓸 필요도 없이 그곳에 가면 자신조차 잊고 있었던 놀라운 기억의 숲을 발견하게 될 것이다. 메모할 노트, 녹음기와 카메라는 물론 필수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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