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인식 시인의 경주인문학산책] 상허<尙虛> 이태준의 문학 작품 속의 경주

경주신문 기자 / 2022년 05월 19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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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태준의 단편소설 <석양>은 그의 경주기행에서 느낀 것들이 그대로 나타나 있다. 그중 오릉은 매헌이 골동품상에서 만난 타옥을 다시 만나는 장소로 묘사하고 있다. <사진제공 : 경주시 관광자원 영상이미지>

상허(尙虛) 이태준은 한국 근대문학의 첫 번째로 꼽는 명문장가이자 한국 단편 문학의 완성자로 평가한다. ‘시는 정지용 산문은 이태준’이라는 말이 있을 정도로 그의 산문은 뛰어났지만 월북을 했다는 이유로 제대로 평가를 받지를 못한 시기도 있었다.

1940년 이화여전에서 작문 강사를 한 경험을 바탕으로 지은『문장강화』는 불후의 명저로 남아있다. 이 책은 당대는 물론 오늘날까지 문예 창작과 문장공부의 고전으로 자리매김하고 있다. 우리나라 문인 가운데 이 책을 읽지 않은 시인과 소설가는 많지 않을 것이다. 그리고 1941년에는 현대 수필 문학사에 빠뜨릴 수 없는 또 하나의 명작『무서록(無序錄)』을 출간했다. 수필집『무서록(無序錄)』에는 탁월한 명문장가로서 진면목을 만날 수 있는 문장들로 가득하다. 무서록이란 순서없이 무턱대고 쓴 글이라는 뜻으로 수필 문학의 특성이 그대로 드러나 있다.『무서록』은 김용준의『근원수필』과 더불어 쌍벽을 이루는 수필 문학의 백미, 또는 정수라고 평가한다.

근대 수필의 최고 경지로 평가되는『무서록(無序錄)』에는 경주와 관련된 글이 수록되어 있다. 바로 <여명(黎明)>이라는 작품이다. 길지 않은 글이지만 군더더기 하나 없이 잘 압축된 문장으로 연결되어있다. 석굴암 일출을 보기 위해 여름날 늦은 밤 토함산에 올라서 해 뜨기를 기다리며 석굴암 대불과 일출 장면을 입체적으로 표현했다. 문장 하나하나가 놓치기 아까운 표현들의 연속이다. 글의 마지막 몇 구절 인용해 본다.

↑↑ 이태준이 1935년 『조광』지에 발표한 수필 <불국사 돌층계>에는 불국사 청운교와 백운교의 모습을 글로 그렸다. <사진제공 : 경주시 관광자원 영상이미지>

‘이윽고 공단 같은 짙은 어둠 위에 뿌연 환영이 드러나심, 그 부드러운 돌 빛, 그 부드러우면서도 육중하신 어깨와 팔과 손길 놓으심, 쳐다보는 순간마다 분명히 알리시는 미소, 전신이 여명이 쪼여질 때는, 이제 막 하강하신 듯, 자리 잡는 옷자락 소리 아직 풍기시는 듯. 어둠은 둘래 둘래 빠져나간다. 보살들의 드리운 옷주름이 그어지고 도틈도틈 뺨과 손등들이 드러나고 멀리 앞산 기슭에서는 산새들이 둥지를 떠나 날아간다. 산등성이들이 생선가시 같다. 동해는 아직 첩첩한 구름갈피 속이다. 그 속에서 한 송이 연꽃처럼 여명의 영주(領主)가 떠오르는 것이었다.-수필 <여명(黎明)>의 일부

무수한 문인들이 석굴암 대불과 일출을 노래했지만 이보다 뛰어난 문장은 아직 보질 못했다. 이태준의 경주에 대한 글은 1935년 『조광』지에 발표한 <불국사 돌층계>라는 작품에서도 그의 뛰어난 문장을 만나볼 수 있다.

‘신라 사람들이 밟던 층계로구나! 생각하니 그 댓돌마다 ‘쿵’ 울리면서 예전 사람들의 발자취 소리가 어느 틈에서고 풍겨 나올 것 같았다. 그들은 어떤 모양의 신발을 신었던 것일까? 그때 부인들의 치맛자락은 얼마나 고운 것이, 또 얼마나 긴 것이 이 층계를 쓰다듬으며 오르고 내린 것일까? 나는 아득한 환상에 잠기며 그 말 없는 돌층계를 폭양(暴陽) 아래에 수없이 오르고 내리고 하였다. 지나간 사람들 발자취, 우리는 어디서 그것을 만져 볼 것인가. 바람에 쓸리고 빗물에 닳았으되 그들이 밟던 돌층계만이 그래도 어루만지면 무슨 촉감을 줄 수 있는 것이다. 어서 가을에 한번 다시 가서 그 돌층계를 만져도 보고 밟아도 보고 싶다.’-수필 <불국사 돌층계> 일부

↑↑ 이태준의 작품 속에 등장하는 오릉의 항공사진. <사진제공 : 경주시 관광자원 영상이미지>

이외에도 ‘불국사에 있는 석사자(石獅子)를 보아도 발은 그 어느 부분보다 보기 좋았다.’ ‘발’이라는 작품을 통해 일제 치하에서 우리 민족의 발자취를 만져볼 수 없음을 신체 중 가장 못난 발을 생각하며 경주 불국사 석사자 발을 보고 민족의 슬픔을 이야기하고 있다.

그런가 하면 그의 단편 소설<석양>은 그의 경주 기행에서 느낀 것들이 오롯이 그대로 나타나 있다. 단편 <석양>은 근대문학 작품 중 경주를 배경으로 하는 최초의 작품이 아닌가 싶다. 초로의 중년 남자 매헌과 아름다운 처녀 타옥과의 만남을 통해 삶과 허무를 이야기한다.

작품의 배경 속으로 발걸음을 따라가 보기로 한다. 먼저 찾아간 곳이 박물관 뜰의 모과나무와 석등이다. 봉덕사종을 보며 물러설수록 웅대하고, 가까이 볼수록 수없이 엉킨 섬세, 웅대와 섬세가 합일된 것으로 문학상 최대작 <전쟁과 평화>를 읽고 났을 때의 감동을 맛보았고, 소리는 종이 지닌 전설보다도 오히려 슬픈 음향이 우러날 것 같다고 묘사한 장면이 압권이다.
 
골동품상에서 타옥에게 우물의 냉수를 얻어 마신 매헌은 여관에 여장을 풀고 난 뒤 첨성대, 석빙고 반월성을 걸어 계림을 지나 문천을 건너 오릉으로 향한다. 다섯 능이 한자리에 모인 초현실적 풍경에 사로잡혀 걷고 있을 때 골동품 가게 그 처녀 타옥을 오릉에서 다시 만난다.

처녀 타옥은 무열왕릉과 괘릉 다 가보았지만 다섯 봉우리가 그려내는 곡선은 보는 각도에 따라 다른 리듬과 하모니를 일으키는 선의 조화를 언급하며 이곳이 최고라고 말한다. 그리고 책 이야기를 하며 니힐(nihil)을 언급한다. 니힐은 이 소설을 관통하는 주제이기도 하다.

↑↑ 이태준이 묘사한 불국사 청운교와 백운교는 어느 면에서 봐도 아름답다. <사진제공 : 경주시 관광자원 영상이미지>

다음날 첫차를 타고 불국사로 향한다. 불국사는 절이라기엔 너무나 목가적인 서정이 무르녹아 있음과 청운교, 백운교의 흐르는 듯한 돌층계에는 곧 무희라도 나타나 춤추며 내려올 듯하다고 표현한다. 석가탑, 다보탑 두 탑과 범영루에 걸터앉아 흰 구름을 보기도 한다. 호텔에서 영지를 내려다보며 슬픈 전설을 통해 또 한번 허무를 이야기한다. 불국사에서 사흘을 머물며 석굴암의 예술적 황홀감에 사로잡히기도 하며 십일면관음상의 손등을 만져보기도 한다.

소설 속 이야기는 해운대에서 마무리되지만 경주가 주무대들이다. 그것도 오릉과 불국사, 석굴암 영지 등 유적지 명소들을 배경으로 남녀 간 사랑의 덧없음과 허무를 이야기하고 있다.

이태준이 배경을 경주를 들고 나온 것은 우리의 소중한 문화유산을 통해 경주의 혼과 민족혼을 바라보고 싶었던 작가주의 정신의 발현으로 볼 수 있다. 비록 오래되고 잊혀진 소설이지만 경주 사람이라면 한번 읽어볼 필요성 있다. Gyeongju is korea라는 문구와 일맥상통하기도 한다.

소설 <석양>뿐만 아니라 수필 <여명>과 <불국사 돌층계>도 함께 읽어보면 즐거움이 두 배가 될 것이다. 아름다운 문장과 아름다운 경주를 동시에 만날 수 있기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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