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봉황대] 조선시대 사람들은 봉황대를 무덤으로 생각지 않았다

풍수지리적 균형 맞추기 위한 인공 언덕으로 인식

경주신문 기자 / 2022년 04월 14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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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주는 1천년 동안 신라의 수도로 번성하며, 수많은 역사적 사건의 무대가 됐다.
하지만 인류 역사에 영원한 국가는 없듯, 신라 또한 고려에 자리를 내주며 역사 속으로 사라졌다.
세월이 흐른 뒤 고려와 조선을 살았던 사람들의 눈에 비친 경주의 모습은 어땠을까.
선조들의 옛 기록을 타임머신 삼아, 지금과는 또 다른 ‘천년고도’ 경주를 만난다. -편집자 주



↑↑ 봉황대 전경.

읍성 교외로 이은 탁 트인 거리
通衢連紫陌
그 가운데 높은 봉황대가 있네
中有鳳臺崇
안팎으로 뻗은 산하는 웅장하고
表裏山河壯
들판에 넘치는 물색도 풍요롭네
郊原物色豐
천문 살핀 곳 벽돌 기운 삼엄하고
氣森觀祲甓
새벽 알리는 종소리 마음 상쾌하네
心爽戒晨鐘
천 년 전 그 흥망성쇠의 한
千古興亡恨
눈길 속으로 모두 들어오네
都輸望眼中
 
조선후기 문신이자 학자인 이현일(李玄逸, 1627~1704)이 지은 ‘봉황대’(鳳凰臺)란 시다. 그의 문집 ‘갈암집’(葛庵集) 권1에 수록돼 있다. 그는 20대 중반이던 1654년 부친의 명령에 따라 경주를 방문하게 된다. 갈암집에 수록된 ‘남정기행’(南征紀行)에 따르면 당시 그는 옥산서원, 봉황대, 김유신묘, 설총묘, 성덕대왕신종, 분황사, 백률사 등을 유람했다. 이 시는 그때 지은 것으로 학계는 추정한다.


이현일은 이 시의 마지막에 ‘천 년 전 그 흥망성쇠의 한/ 눈길 속으로 모두 들어오네’라고 썼다. 그가 봉황대 위에 올라 경주의 옛 모습을 떠올리는 모습이 그려진다.

↑↑ 1950년대(추정) 봉황대와 주변 모습. [경주신문 DB]

◆조선시대 봉황대는 무덤이 아니었다

“이 무슨 말도 안 되는 소리냐”고 반문할 수도 있겠다. 조상을 성심껏 섬겼던 유교사회 조선에서, 조상의 무덤 위에 올라가는 게 가당키나 하냐고 말이다.

하지만 봉황대가 무덤이란 사실을 몰랐다면 얘기는 달라진다. 실제로 조선시대 사람들은 봉황대를 무덤으로 생각하지 않았다. 아래 글은 이현일과 같은 시대를 살았던, 조선의 문신 김수흥(金壽興, 1626~1690)이 쓴 ‘남정록’(南征錄)의 일부다.

먼저 봉황대에 올랐는데, (봉황)대는 (경주)부성의 남쪽에 있었다. 하나의 작은 언덕이어서 그 꼭대기에 오르니, 사방을 바라보는데 거리낌이 없었다. 대의 전후좌우에 인공으로 만든 산 수십 곳이 있는데, 이 대만은 인공으로 만든 산이 아니라고 한다.

조선후기 선비 박종(朴琮, 1735~1793)의 기행문 ‘동경유록’(東京遊錄)엔 이런 내용도 있다.

봉황대는 남문 밖에 있다. 종각 오른쪽으로 몇 걸음 떨어져 우뚝한 모양의 토봉(土峰)이 들 가운데 서 있는데, 주위는 80~90보, 높이는 7~8장쯤 된다. 그 위에는 가히 100명의 사람이 앉을 수 있으며, 죽은 나무가 헝클어져 덮여 있다. 거기에 올라 사방을 바라보면 산, 강, 성, 관사, 누각과 마을 집들이 모두 한눈에 들어온다. 다만 이 봉황대가 신라 어느 때 축조됐고 대의 이름은 무엇을 의미하는지는 알지 못한다. 봉황대의 근방에는 알의 형상으로 된 토봉이 많은데, 모두 사람이 만든 것이고 천연으로 된 것은 아니어서, 이 또한 괴이한 일이다.

김수흥은 봉황대를 자연적으로 형성된 언덕 정도로 알고 있었다. 박종은 인공으로 쌓은 구조물로 인식했다. 각기 파악한 내용에 조금씩 차이가 있지만, 당대 사람들이 봉황대를 무덤으로 생각하지 않았다는 것만큼은 확실하다.

◆아파트 7층 높이…경주에서 가장 큰 고분
봉황대는 지름 83m, 높이 21m로, 경주 고분 가운데 단일 고분으로는 가장 크다. 아파트로 치자면 7층 정도 높이다. 요즘이야 별 것 아닌 규모지만, 그 옛날 평지에 쌓은 인공구조물로는 흔치 않은 높이다. 사실 대릉원 안에 있는 황남대총이 봉황대보다 규모면에선 더 크지만, 황남대총은 두 개의 무덤이 하나로 합쳐진 형태다.

봉황대는 아직 본격적인 발굴조사가 이뤄지지 않았으나, 정상부가 함몰돼 있다는 점을 고려하면 주변 대형 고분과 같은 돌무지덧널무덤으로 추정된다. 무덤 북서쪽 앞에는 조선 후기에 세운 비석이 남아 있다. 앞면엔 한자로 ‘봉황대’라는 글자가, 뒷면엔 ‘기해년 맑은 날에 태수가 쓰다’란 글자가 새겨져 있다.

사실 봉황대란 이름만 보더라도 조선시대 사람들이 무덤으로 인식하지 않았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 ‘천마총’, ‘태종무열왕릉’처럼 무덤 이름에 ‘무덤 총’(冢) 자나 ‘언덕 능’(陵) 자를 쓰지 않고, ‘높이 쌓아 올려 사방을 바라볼 수 있게 만든 곳’을 뜻하는 ‘대 대’(臺) 자를 이름에 썼다는 점에서다.

사실, 대다수 경주 사람들도 이 고분이 왜 봉황대란 이름을 갖게 됐는지에 대해 잘 알지 못한다. 1980년 경주시가 발간한 ‘신라의 전설집’엔 봉황대라는 이름의 유래와 관련해 다음과 같은 이야기가 실려 있다.

통일신라 말기 한 풍수가가 고려 태조에게 신라를 멸망시키기 위해선 서울(경주)의 지형을 변형시켜야 한다고 했다. 서울의 지형은 봉황의 둥지를 닮아 천 년 동안 크게 번영했지만, 지금 봉황이 날아가려 하니 이를 붙잡기 위해서 큰 알을 많이 만들어야 한다는 것이었다. 때마침 신라의 형편이 기울어가고 있었으므로 임금은 많은 사람을 동원해 알처럼 생긴 흙더미를 많이 만들었다는 이야기다.

↑↑ 봉황대 앞 비석 사진.

◆후대에 만들어진 이름 유래 이야기

그러나 경주 도심 내 큰 무덤들은 대부분 4~5세기에 만들어진 왕과 귀족의 무덤이란 점에서, 이 이야기는 신라의 쇠퇴와 고려 부흥의 당위성을 설명하기 위해 후대에 만들어진 것으로 추정된다는 게 국립경주문화재연구소 측의 설명이다. 결국 이 이야기는 신라가 멸망하고 한참이 지난 후대 사람들이 봉황대와 그 주변 고분을 무덤이라 생각하지 못하고, 풍수지리적 균형을 맞추기 위한 인공 언덕으로 인식했다는 것을 보여주는 사례인 셈이다.

사실 국내에 봉황대란 이름의 누각이나 조망터는 경주뿐만 아니라 경북 김천, 강원 춘천·평창, 충북 영동, 경남 의령 등 곳곳에 있다. 대부분 당나라 시인 이백(701~762)의 ‘봉황루에 올라’라는 시에서 따온 것으로 추정한다.

소장 역사학자이자 작가인 황윤은 경주 봉황대도 마찬가지로 이백의 시에서 비롯된 이름일 것으로 추정한다. 조선시대엔 이곳을 흙으로 쌓은 누각으로 생각했고, 봉황대에 올라 주변을 둘러보며 이백이 된 것 같은 기분을 만끽하곤 했었을 것이라는 견해다.

그렇다고 이백의 기분을 만끽하기 위해 고분에 올라가는 것은 절대 금물이다. 문화재보호법에 따라 2년 이하 징역이나 2000만원 이하의 벌금에 처해질 수 있으니 말이다.


김운 역사여행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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