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립고궁박물관에 세운 서예의 새 기초 ‘적심’

박진우 작가, 역사와 시간, 사람과 마음의 쌓임 역작으로 풀어

박근영 기자 / 2021년 12월 16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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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30평 도입부 전시공간에 조화롭게 배치된 박진우 작가의 서예작품 ‘적심’.

↑↑ 국립고궁박물관에서 역작을 선보인 박진우 작가.
지난 12월 1일부터 내년 2월 27일까지 경복궁 옆 국립고궁박물관 1층에서 경주 출신 박진우 작가의 아주 특별한 서예 전시회 ‘고궁연화(古宮年華)’전이 열린다. 경복궁 발굴복원 30주년을 기념해 열리는 전시회에서 박진우 작가가 도입부 전시를 맡아 자신의 기량을 한껏 펼쳐 보인 것이다.

특히 이번 전시회는 박진우 작가가 이 전시를 의뢰 받은 후 그야말로 심혈(心血)을 기울인 고심 끝에 찾아낸 화두인 ‘적심(積心)’이 서예로 승화된 현장이 관람객들을 압도한다. ‘적심’은 궁궐 기둥을 세울 때 건물의 구조적인 안정을 위해 기둥 아래 구덩이를 파고 돌이나 자갈, 기와 등을 넣어 다진 기초를 일컫는다.

경복궁 발굴·복원을 ‘작가의 자유로운 시각으로 궁을 떠올릴 수 있는 이미지로 연출해 달라’는 부탁을 받은 박진우 작가는 그때부터 치열한 내적 고심과 부담을 느꼈다고 술회한다.

“건천궁 내 장안당 툇마루에 앉아 복원을 거의 끝내가는 향원정을 바라보며 여러 생각들을 했습니다. ‘네 마음대로 해봐. 그런데 여기는 ‘국립’고궁박물관이라는 걸 염두해 둬!’ 이렇게 들리는 듯 했어요”

주어진 시간은 작품의 주제와 조형 아무것도 결정이 되지 않은 상태에서 촉박하기 이를 데 없는 30일! 그때부터 박진우 작가는 경복궁 관련한 책들을 빌려오고 문화재청 사이트에 들어가 경복궁 발굴·복원과 관련한 발굴보고서는 모두 다운받아 공부했다. 유튜브에 공개된 경복궁 발굴·복원 30주년 기념 학술대회도 꼼꼼하게 챙겨봤다.

“고심을 거듭하다 문화재청 최인화 연구관님의 ‘적심’과 관련한 논문과 거기에 사용하신 이미지와 도표들이 눈에 확 들어왔습니다”

적심은 여러모로 박진우 작가에게 의미를 부여했다.

“적심은 건물의 바탕이어서 일제가 건물과 기단부를 훼손시켰어도 적심이 복원의 실마리를 제공했지요. 그래서 적심을 ‘건물의 DNA’로 명명했습니다. 그런데 그것을 구성하는 요소들이 잘 다듬어진 장대석뿐 아니라 깨지고 모난 돌, 기와와 도자 파편, 여러 흙 등 볼품없고 이름 없는 것들이 한데 모여 큰 에너지를 응축한다는 느낌을 받았습니다.

특히 박진우 작가는 적심이라는 글자가 가진 그대로 ‘마음이 쌓여있다(積心)’는 점에 주목했다.

“웅장하고 화려한 전각들을 만든 옛사람들의 마음. 발굴과 복원을 하는 현재 우리들의 마음 등이 먼저 가슴 속에 들어왔는데 제가 하고 있는 적묵(積墨) 작업과도 유사성이 있었고요!”

그렇게 ‘적심’을 전시의 주제로 확정짓고 나니 3주의 시간이 남았다. ‘무엇을’이라는 물음의 답을 찾는 데만 한 주를 써버린 것이다. 그럼 이 적심을 어떻게 표현해야 했을까?

“이 작업은 이전의 작업들과는 달리 3차원 공간 전체가 전시의 대상이었습니다. 도입부 공간이 가로, 세로 각 약 10미터, 높이 3미터의 30평 공간이었습니다. 단순히 작품을 벽면에 거는 것을 뛰어넘어 적심을 다양한 측면에서 보여주고 싶었습니다”

그래서 착안한 것이 적심의 ‘수평’과 ‘수직’ 개념이다. 발굴현장을 드론으로 찍듯 하늘에서 본 적심이 ‘수평단면 적심’이고 발굴현장의 토층을 정면에서 절개하듯 단면을 응용한 것이 ‘수직단면 적심’이다. 전시장에는 모두 7개의 수평단면 적심과 4개의 수직단면 적심이 전시되었다. 이 전시를 통해 경복궁 발굴 현장을 직접 갈 수는 없지만 발굴·복원의 핵심이자 실마리인 적심을 여러 각도로 볼 수 있도록 계획한 것이다.

“‘수평단면 적심’은 경복궁 발굴현장을 관람객이 직접 들어가서 그 곳을 내려다보며 배회한다는 한다는 느낌을 줄 수 있도록 바닥에 구현했고 ‘수직단면 적심’은 원본 혹은 크롭해 확대한 이미지를 ‘천’의 형태로 늘어뜨려 적심 위 기둥을 연상시켜 관람자가 땅 아래로 내려가 궁궐 내부의 기둥 사이사이를 걷는 듯한 느낌을 주고 싶었습니다”

여기서 박진우 작가는 자신이 의도한 생각과 이미지 이상으로 실제 전시장에 해석해 구현시킨 ‘고궁연화 전시팀’ 이지혜 디자이너의 공을 크게 내세웠다.

실제 작업은 지난 번 한양대학교 박물관 ‘우주 시리즈’에서 보여준 먹물 뿌리기 - 드리핑 작업이었다. 여기에는 먹이 단순히 검기만 한 것이 아니고 먹 재료에 따라 다양한 색을 낸다는 박진우 작가의 평소 관념이 크게 작용했다. 다양한 먹색이 적심의 돌과 기와, 도자기 같은 여러 질감을 차별성 있게 구현한다는 것!

작업이 확정된 후 한지에 돌을 깔고 붓에 먹을 적셔 뿌리는 지난한 작업이 시작되었고 돌을 걷어낸 후 다시 흰 공간에 색을 들이는 고된 작업이 밤낮없이 되풀이 됐다. 이 과정에서 먹에 절은 손가락이 부르터 피가 났고 허리에 무리가 가 아내가 출산 때 찼던 복대를 차고 작업해야 했다. 이 내용은 아내 오다연씨의 페북 기록에서 찾은 내용이다.

“언더그라운드 시리즈(Underground Series)의 첫 작업으로 선보인 <적심> 작업은 흙과 돌이 주제였습니다. ‘적심’은 ‘쌓다’라는 개념과 ‘돌’이라는 물성에 주목했습니다. 시간의 흐름 속에 지층이 쌓여있는 모습은 담묵(淡墨)부터 농묵(濃墨)까지 수만 가지의 먹색을 쌓아올리는 적묵(積墨)과 오버랩 되었습니다. 거기에 돌이 가진 단단한 힘과 에너지를 구현시키기 위해 실제 돌들을 과감하게 사용했고요”

전시장 전면에 연출한 ‘수평단면 적심’ 두 작품은 돌을 사용한 작업 과정을 보여주기 위해 작품 위에 실제 사영했던 돌들을 그대로 올려놓았다. 이렇게 ‘적심’이 완성되었다. 이런 치열한 과정을 거친 박진우 작가는 작품을 제작하고 전시하는 도중 ‘적심’의 뜻이 더욱 분명하게 인식되었다고 고백한다. 그래서 이번 전시회는 더더욱 가치 있게 보인다.

“전시를 진행하면서 이 전시에 참여하는 앞서 밝힌 역사와 시간 발굴의 노력과 땀뿐 아니라 박물관 전시팀과 디자이너들의 치열한 마음과 정성, 제 곁에서 고뇌하고 작업에 미쳐 있는 저를 본 아내의 애처로운 마음까지 차곡차곡 쌓여 감을 느꼈습니다. 그야말로 적심 그 자체였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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