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가 박수미, 말을 잡아 삶을 추는 때창을 열다

즐거움 가득한 한지 작품, 시대를 관통한 또 다른 신라의 발견

박근영 기자 / 2021년 11월 11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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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때창 전시회 당시의 작품을 설명하는 박수미 작가.

신라의 토우(土偶)를 자세히 보면 표정들이 매우 밝다. 모습도 마치 살아있는 것처럼 원초적이고 자유롭다. 부장품인데도 이렇게 밝고 활기찬 표현을 할 수 있다는 것은 신라 사람들이 얼마나 삶을 사랑하고 죽음조차 밝게 보았는지 알 수 있게 한다. 배리의 석조삼존불이나 삼화령 석조미륵삼존불의 환하게 웃는 얼굴이나 인면와당으로 유명한 ‘신라인의 미소’ 수막새 역시 신라인들의 밝은 심성을 보여주는 즐거운 예다.

작가를 소개하는 글에서 토우의 밝음을 이야기하는 것이 이상할 듯하다. 이번에 소개할 박수미 작가가 토우와 밀접한 관련을 맺고 있는 작가이기 때문이다.

박수미 작가의 작품을 처음 보았을 때 느꼈던 감정은 ‘흥겨움’이었다. 심지어 작품을 직접 본 것도 아니고 한지를 꼬아 만든 10호도 안 되는 작은 작품을 카카오톡 사진으로 받아본 것인데도 한 동안 작품에서 눈을 떼지 못했다. 작품이 즐겁게 느껴져 한참이나 작품 사진 보낸 변성희 한국관광정책정보연구원 원장과 작품을 두고 이야기를 나누었다. 그 작품은 박수미 작가가 지난 4월 (사)한국미술협회 경주지부(회장 최영조)가 기획한 제1회 ‘그림사기 좋은 날’에 출품한 것이었다. 한지를 한 가닥씩 꼬아 화면 가득 굴곡지게 배치한 작품에 농도가 다른 푸른 색 물감으로 염색한 한지로 춤추는 듯한 실루엣 하나를 새겨 넣은 작품이었다. 얼핏 보면 색칠 된 부분만 춤사위 같지만 화면 전체가 역동성을 가지지 않고서는 표현될 수 없는 즐거움이 그림 속에서 생생하게 느껴졌다.

↑↑ 박수미 작가의 ‘삶을 추다’ 한지 46 x 54cm.

-자화상에서 꽃과 풍경 이어 ‘말’을 잡은 후 만난 토우, 그리고 즐거움 가득한 한지 작품

지난달 29일 오후, 변성희 원장과 함께 박수미 작가의 솟티길 작업실을 찾았다. 전시회를 통해 작품을 보는 것이 합당하겠지만 그럴 기회가 없어 작업실에서라도 박수미 작가의 작품을 더 접해보고 싶었고 작품을 보면서 처음 느꼈던 즐거움의 실체를 확인해보고 싶었기 때문이다. 예상대로 박수미 작가의 작업실은 생활공간 자체가 자신의 작품들로 차분하게 둘러져 있었고 지금도 예의 한지 작품도 몇 점이나 걸려 있었다.

“한지로 작업한 것은 여러 과정을 거친 후의 결과이지만 어느덧 20년 정도 지난 것 같아요”

박 작가는 대구대 미술대학 회화과에서 한국화를 전공할 때의 기억부터 자신의 미술세상을 회고하기 시작했다. 대학시절 대상을 그리기 위해 사진 작업을 열심히 했는데 어느 순간 사진 없이는 작업을 제대로 할 수 없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사진이 주는 소재에서 벗어나 선택한 것이 자화상.

“제 내면에 뭐가 있는 작업을 20대까지 했는데 아무리 들여다봐도 뭐 이렇다 할 게 없더라고요 사실 제 속에 대단한 무언가가 있을 줄 알았는데요”

실상을 따지면 20대에 자신이 아무것도 아니라는 것을 깨달았다는 것 자체가 그만큼 치열하게 자신의 미술세계를 고민했다는 증거일 것이라고 동석한 두 사람이 입을 모았다. 60이 되고도 자신이 별 개 아니란 것을 깨닫지 못하는 사람들이 차고 넘치는 세상이고 결국 자기의 틀 속에서 한 발도 벗어나지 못하는 사람이 대부분이기 때문이다.

자화상에서 벗어나면서 박수미 작가는 꽃과 풍경 등 자연에 매료되기 시작했다. 그런데 막상 꽃과 풍경을 그리려니 이 분야의 그림이 뜻대로 그려지지 않아 대학시절 이에 대해 제대로 배워두지 않았던 것이 후회되기 시작했고 그런 만큼 꽃을 확대하거나 구조를 파악하는데 열중하면서 그리기에 몰두했고 한지에 흙을 붙인다거나 하는 식으로 재료를 다양화 시키며 나름의 꽃을 그려나갔다.

“그러다가 어느 시점부터 제가 ‘꽃 작가’로 불린다는 것을 알았어요. 다시 한계를 느끼게 되었고 꽃을 일체 그리지 않게 되었지요”

그렇게 갈등을 겪을 무렵 마침 경북창작미술협회에서 1년에 한 번씩 하는 테마전에 참여하게 되었다. 그해 테마가 ‘물’이었는데 물을 어떻게 표현할까 고심하다가 자신의 속에서 폭포가 넘쳐흐르는 듯한 표현을 해보자는 의도로 작업을 했는데 의도한 대로 분명한 이미지가 만들어지지 않았다.

“그때 마침 학생들 모집하기 위해 뿌리고 남은 전단지들이 눈에 들어왔어요, 이걸 꼬아서 꿈틀이 지렁이 젤리처럼 입에서 늘어뜨리듯 작업하고 나니 비로소 의도하는 대로 작품이 완성되었어요”

그게 종이와의 첫 인연이었고 이후로 마트전단지 신문전단지 등을 활용하며 작업을 넓혀나갔다. 그러나 이런 전단지들이 지나치게 어지럽다는 판단을 하며 조금 더 좋은 소재를 찾아야겠다고 생각했을 때 자연스럽게 한지가 떠올랐다. 한국화를 전공하면서 이미 익숙했던 소재와 비로서 다시 만난 것.

“이때부터 한지를 염색하고 꼬아서 일일이 잘라 그림에 맞추어 붙이는 작업을 시작했지요. 그런데 이게 여간 힘든 작업이 아니었어요”

한 번 작업하기 시작하면 일일이 그림에 맞추어 꼬아놓은 한지를 배치하기 위해 10호 내외의 작품에도 하루에 열서너 시간, 며칠씩 사투를 벌이느라 허리와 어깨가 욱씬거리기 일쑤였다고.

“이 작업이 매력적이었던 것은 제가 머릿속에 계획은 하지만 재료를 꼬아서 배치하는 과정에서 저도 예상하지 못한 일종의 특별한 흐름이 만들어지는 겁니다. 저의 계획과 재료의 물성이 함께 어울려 때로는 의도하지 않았지만 자연스럽게 새로운 결과가 나오는 것이 여간 흥미롭지 않은 겁니다”

박 작가의 한지 작품이 유난히 흥겹고 자연스럽게 느껴지는 이유가 비로소 객관적으로 이해되기 시작했다. 특히 한지 작품을 하면서 형태나 색감보다는 선에 대해 생각이 더 많아졌다고 고백하는 부분에서 고개가 저절로 끄덕여진다.

곡선을 주로 사용하는 박수미 작가의 작품은 전체적으로 파도나 바람이 조화롭게 휘둘리듯 어느 접선에서도 머뭇거리거나 걸리는 데가 없다. ‘재료를 믿고 작업했다’는 박 작가의 자신감 넘치는 말에서 보듯 작품에 사용된 한지들이 스스로 어울려 접선 자체를 잊어버리고 유유히 흐른다는 표현이 맞을 법하다.

↑↑ 자신의 작품 세상을 설명하는 박수미 작가.

-제1회 경주미술인상에 선정, 2020년 중소벤쳐기업부 로컬 크리에이터 지원사업에 선정, 토우 캐릭터 ‘경주다운 기념품’ 제작도

지금의 작품과 달리 한 때 박수미 작가의 작품 속에는 우리의 말이 자연스럽게 녹아 있어 그 시절의 작품도 눈길을 끈다. 10여년 전 ‘말을 잡다’는 주제로 역시 한지를 꼬고 염색하여 작품을 만들었다. 말이란 것이 실체가 없으니 결국 한글을 형상화 시켰는데 말마다 그 말의 쓰임과 사용하는 사람, 분위기, 기분에 따라 다르다 보니 결국 이것을 효과적으로 표현하면서 새로운 작품이 만들어진 것. 박 작가의 설명을 듣고서야 비로소 10여 년 전 인사동에서 남리 최영조 화백의 인솔로 진행되었던 ‘경주의 유망작가 7인전’ 전시회가 떠올랐다.

그 당시 박 작가가 잡았던 ‘말’은 10여 년의 시간이 지나면서 새로운 생기와 열정을 더해 어느 새 흥겨운 춤사위가 되어 ‘삶을 추는’ 경지로 다다르게 된 것이다. 박수작가의 작업실 벽에 걸린 작품 2018년 ‘삶을 추다’ 전에 출품했던 작품과 박수미 작가가 기자를 위해 일부러 꺼내 보여준 굴곡진 작품 한 점은 박수미 작가의 한지 작업이 물이나 바람처럼 자유롭게 흘러 그 자체 느긋하고 즐거운 춤사위가 되었음을 여실히 보여준다. 그리고 바로 이 작품들 속에서 바로 그 밝은 표정의 신라 토우들이 유유히 노닐고 있고 어느 시점에서는 20대 때 극렬히 추구했던 박 작가 자신이 그 속에 녹이 있음이 느껴졌다.

천 년 전 신라의 장인들이 표현했던 토우들의 웃음과 율동이 박 작가의 작품 속에서 온전히 살아난 느낌은 그 자체로 기막히게 특별한 발견이다. 그런 의미에서 박 작가의 흥과 즐거움 가득한 승승장구가 누구보다 기대된다.

마침 박 작가는 지난 6월에 (사)한국미술협회 경주지부에서 기획한 경주미술인상에서 첫 번째 추천작가로 경주예술의 전당 알천미술관에서 개인저 ‘때창’ 전시회를 열었다. 전시회는 보지 못했지만 작업실에 걸려 있는 때수건-이태리 타월로 제작된 작품을 일부나마 감상하면서 박 작가가 한지가 아닌 때수건이라는 소재를 쓰면서 선에 못지않게 색을 자유자재로 쓰는 놀라울 만큼 대담한 감각을 보여준다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박수미 작가를 취재하는 와중에 접한 또 하나의 재미있는 사실은 미술의 생활화에 적극적으로 참여하고 있다는 것이다. 신라 토우들을 기반으로 한 캐릭터들로 2020년 중소벤쳐기업부에서 주최한 ‘지역기반 로컬크리에이터 활성화 지원사업’에 지원, 무려 22대1의 경쟁률을 뚫고 선정되어 경주를 알릴 기념품들을 만들게 된 것이다. 이 결과 아트토이, 마스킹 테이프, 그림엽서, 파우치, 필통, 키링, 손수건, 간이 다이어리 등 10여점의 상품이 만들어져 있지만 코로나19의 여파와 지속적인 마케팅의 부재로 활성화 되고 있지 못한 것이 아쉽다. 경주의 관공서나 기업, 학교와 출향 단체들이 단체로 ‘경주다운 기념품’을 만들 때 적극적으로 고려해봄직한 핫한 아이템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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