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술하는 성웅스님 영화 같은 무애행 !!

서양 학생들에게 무술·불교로 동양문화 가르쳐

박근영 기자 / 2021년 05월 27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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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무술과 영화로 무애행을 걷고 있는 성웅스님.

지난 주 부처님 오신 날을 전후해 가평군 연인산 기슭에 자리 잡은 ‘불광사(佛光寺)에 특별한 젊은이들이 들어와 생활하는 모습이 눈에 띄었다. 특별하다고 여긴 것은 그들이 벽안(碧眼)의 선남선녀들이었기 때문이다.

“그 친구들은 모두 나에게 동양무술을 배우는 제자들입니다. 모두 대학생들인데 부처님 오신 날을 맞아 특별히 입산수련 중입니다”

경주 출신의 불광사 주지 성웅스님이 담담히 미소 띠며 기자에게 설명했다.

“서울의 어느 공원에서 운동하고 있는데 늙은 중이 훨훨 날아다니는 것처럼 보여서 신기했나 보더군요”

처음 성웅스님과 인연을 맺은 사람은 스위스 출신의 애드워드 군(한양대학교 공대).

“지금하고 있는 운동이 무슨 운동이냐고 물어 동양무술(Orintai martial arts)이라고 알려 주었죠. 이걸 배울 수 있느냐고 해서 내일 아침에 공원으로 나오라고 하니까 나왔더라고요”

단순히 호기심으로 접근하는 줄 알았는데 며칠 배워 보더니 비용을 드릴 테니 제대로 좀 가르쳐 달라고 매달리기 시작했다는 것. 그도 그럴 것이 스님은 세속 나이 66세인 지금도 물구나무서기로 계단을 오르고 백스핀과 핸드스프링 등 고난도 기계체조를 거리낌 없이 소화해 낸다.

“그래도 내가 명색이 중인데 돈은 받을 수 없고…, 꼭 배우고 싶으면 절로 오라고 했지요”

그렇게 인연을 맺은 후 한 명씩 친구들과 함께 오기 시작해 애드워드를 비롯 한양대학교에 재학 중인 에드리안(프랑스, 공대), 마샤(스위스, 경영) 쥴리에(프랑스, 공대) 등의 학생들이 성웅스님의 ‘속가제자’가 된 것이다.

성웅스님의 어떤 면이 배울 만하냐는 질문에 이들 제자들은 한 마디라고 ‘가장 위대한 스승(Greatest teacher)’이라고 입을 모은다. 그 모습에 성웅스님이 빙그레 웃는다.

↑↑ 성웅 스님에게 무술을 배우고 있는 서양 대학생들.

산사에서의 수련은 그러나 서양 젊은이들에게 적잖게 혹독하다. 새벽 5시면 어김없이 일어나 예불과 함께 108배를 하고 참선까지 한다. 그런 다음 아침 수련 후 공양. 공양 후에는 절 주변을 청소하고 10시부터 사시불공을 올린다. 예불 후에는 다시 수련. 이정도로만 해도 예불과 참선, 108배 등에 익숙하지 않은 젊은이들에게는 보통의 고역이 아니다. 대신 점심공양 후 해가 뜨거운 낮에는 마음껏 자유시간을 누린다. 그들은 평상에 누워 낮잠을 즐기기도 하고 연인산에서 내려오는 1급수 계곡물에서 물수재비를 뜨거나 멱을 감기도 하고 산을 오르기도 한다. 그러나 오후 6시에는 저녁 예불 후 공양하고 다시 야간 수련시간이 기다린다. 정규적인 절 생활에 무술 시간을 더한 것.

“이들 중 태국 무에타이나 일본 가라데를 오래 배워 꽤 운동한 친구도 있어요. 그러나 전반적으로 참선과 수련 과정을 통해 동양무술과 친해지고 우리 불교문화를 이해하는 계기가 되니 이 역시 좋은 인연이지요”

성웅스님은 매우 독특한 이력의 소유자다. 스님은 문화고등학교 재학시절 경주는 물론 전국을 떨어 울리는 운동선수로 올림픽을 목표로 했던 동시에 한편으로 그 무렵 인기 절정이던 이소룡의 영향을 받아 액션배우가 되고 싶다는 꿈을 동시에 꾸고 있었다고.

“유도대학(지금의 용인대학교)에 진학하기 위해 실기시험을 치는데 현장에서 수백 명을 두 파트로 체급 나눈 후 무제한 토너먼트로 마지막까지 이기는 10명이 남을 때까지 대련을 붙이더군요”

그 데스매치(Deathmatch)에서 선발된 데다 당시 몬트리올 올림픽 은메달리스트로 유명세를 떨쳤던 장은경 코치의 눈에 들어 ‘앞으로 제대로 운동해보자’며 의기투합까지 했다.

“그런데 결국 서울예전으로 갔지요. 영화배우가 되고 싶다는 꿈이 더 강렬했어요. 한국판 이소룡이 되고 싶었던 게지요”

↑↑ ▲성웅스님의 지도에 따라 무술을 배우는 외국인 학생들.

-운동선수에서 영화배우로 변신, 다시 불문에 귀의한 영화 같은 삶, 자기 그릇대로 살 뿐, 대중들 참선 꼭 해볼 것!!

영화계로 발을 내디딘 스님은 서울예전 재학 중에 아르바이트를 겸해 다수의 한국·홍콩합작 무협영화에 출연하기 시작했다. 그런데 이때 홍콩 배우들은 한국배우들과 달리 이미 무술영화에 화려한 기계체조를 접목해 액션의 질을 한 차원 높여 놓았더라는 것. 당시 그런 기술은 YMCA에 개설된 기계체조 강습이 유일했다고. 바로 달려간 스님은 기계체조 배우랴, 전공 공부하랴, 영화 찍으랴 몸이 열 개라도 모자랐다고 회고한다.

“그때는 요즘처럼 스턴트맨이란 게 없었어요. ‘으악!’하고 죽는 역할이라고 해서 ‘으악새’라 불렀는데 주·조연들과 제대로 합을 맞출 으악새들이 태부족이다 보니까 하루에도 스무 벌씩 옷을 갈아입으면서 혼자서 온갖 다양한 대역과 단역들을 소화해야 했어요”

성웅스님은 당시 액션영화에서 주가를 올리던 이두용 감독과 김정용 감독, 김효천 감독 등 내로라하는 감독들에게 큰 신임을 얻었다. 단역을 주로 했지만 액션계에서는 무술감독으로 활동하다 뒤에 ‘전국구’란 영화로 감독으로 활동한 배우 권일수 씨, 무협배우로 명성을 얻었던 안태섭 씨 등 무협 영화계 인사들과 활발한 교유를 가졌다. 배우협회와 영화인 협회 회장을 두루 지낸 신우철 감독에게는 영화액션을 전수받았다. 이두영 감독의 지휘 아래 당대 여성 트로이카로 이름 높았던 유지인씨와 함께 ‘경찰관’, ‘오빠가 있다’ 등의 영화를 찍기도 했다.

“사실은 그때 친하게 지내던 감독이나 배우들을 쫓아다니며 좀 키워 달라고 부탁했어야 했어요. 그런데 운동선수 출신에 늘 남들 위에 군림하던 버릇, 그 못난 습, 덜 떨어진 자존심만 세웠으니…”

‘다 인연 따라 제 그릇대로 사는 것’이라며 한때의 기억을 되짚던 성웅스님은 영화촬영 도중 떨어지는 가마에 짓눌려 쇄골이 부러지는 중상을 입은 후 잠시 영화계를 떠나 경주에서 태권도 도장을 운영하며 또 다른 삶을 살기도 했다.

그렇다면 성웅 스님은 어떤 연고로 불문(佛門)에 귀의하게 됐을까?

“내 무술 사부님이 1976년 경주시(당시 월성군) 양남면 보덕암에 계시다가 1978년에 조계종 총무원 감찰부장을 지내셨던 보원당 허주스님이셨어요. 소림무술을 통달하신 무승(武僧)이셨지요”

그 무렵 불문에 ‘건달’들이 적잖게 들어오던 때였는데 허주스님은 혹시라도 그런 부류들이 들어올라치면 혹독한 훈련을 시켜 스스로 못 이겨 나가도록 해서 내쫓았다. 그런 과정 끝에 성웅스님이 속가제자로는 처음으로 인정받은 것이 불문과의 첫 인연!! 워낙 무술에 심취해 있던 성웅 스님은 그 무렵 원광 사부와 력호산 사부를 모시고 우리 민족 비전 무술인 풍류도를 배우기도 했다. 그렇게 무술에 심취해 있을 때 뜻밖의 사건이 생겼다.

“90년 초에 가장 믿던 친구가 세상을 떠나면서 인생이 다 허무하게 느껴졌습니다. 그 일로 세속과 급격히 멀어지기 시작했어요”

1990년, 이미 결혼해 딸까지 한 명 있어 법화종에서 머리를 깎은 스님은 여러 절차를 마친 뒤 2001년부터 조계종에서 승려활동을 이어왔다. 중앙승가대학교 사회복지학과를 졸업한 성웅스님은 포항옥선사회주인 청암당 법조 큰스님을 은사스님으로 모셨다.

↑↑ 부처님 오신날 관불의식을 위해 컨테이너 법당 앞에 모셔진 석불과 아기 부처님.

성웅스님은 부처님 말씀을 전하고 스스로를 닦는 수도승으로 ‘욕심 없이 편안한 것’을 가장 큰 즐거움으로 삼아 생활한다며 탈속의 심정을 표현한다. 법랍만 30년, 한때는 큰 절의 주지로 있으면서 시민체육대회에 동네를 대표해 씨름선수로 출전하며 ‘씨름하는 스님’으로 유명세를 타기도 했지만 지금은 토굴과 다름없는 암자에서 번잡한 사무행정을 떠나 자신의 뜻대로 수행하며 유유자적하는 것이 가장 속내에 맞는 일이라며 자애한다. 실제로 불광사는 말이 절일 뿐 컨테이너 박스 두 량을 덧대 한 량은 부처님 모신 법당으로 쓰고 한 량은 요사체로 쓰는, 절이라기보다 토굴에 가깝다. 그러나 스님에게 이 절은 어떤 크고 높은 대웅전이나 수십 칸 요사체보다 편하고 넉넉한 곳이다.

그러나 세속의 질긴 인연, 특히 연극·영화계와의 인연은 도를 깨우쳐 가는 이즈음에 이르러 오히려 새롭게 맺어지고 있다. 성웅스님은 2016년 동국대 이해랑예술극장에서 공연한 연극 ‘경허’에서 내레이션을 맡아 큰 반향을 일으켰다. 우리나라 선불교의 맥을 잊고 거침없는 언행으로 이름 높은 경허스님의 무애행(無碍行)을 조명한 이 연극에서 성웅스님은 참선을 통한 사자후로 많은 관객과 평단에 깊은 인상을 남겼다. 스님은 당시 함께 공연하던 연기자들에게 참선의 진면목을 가르치면서 ‘좋은 연기를 하려면 참선을 꼭 해볼 것’을 자주 권했다며 자신을 똑바로 볼 수 있고 부동심을 가질 수 있도록 하는 참선은 연기자들뿐만 아니라 대중이 반드시 해 보아야 할 공부라 강조했다.

성웅스님은 코로나19가 끝나면 우리나라 주먹계의 전설 ‘김두한’을 소재로 한 ‘소년 김두한’에서 법명 그대로 소년 김두한을 일깨우고 무술을 가르치는 성웅 스님으로 출연할 예정이다.

“영화는 또 다른 설법이지요. 제 역할이 중이라면 더 좋겠지만 다른 역할이라도 고맙게 받아들일 겁니다. 늙은 중이 연극도 하고 영화도 한다고 소문나면 그게 곧 포교 아닐까요?”

‘중이 중다우면 어려울 게 하나도 없다’며 다시 태어나면 백 번이라도 머리 깎겠다는 성웅스님. 스님에게는 무술과 영화가 또 다른 무애행으로 보인다. 파란 눈의 젊은이들이 굳이 성웅스님을 찾아온 데는 바로 이런 드라마틱한 모습이 돋보여서가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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