엄기백, 돈키호테PD는 가고 판초 배우가 온다!

사회적 타이틀 다 떼고 단역배우 시작한 70어름 또 다른 시작, 아름다운 청춘!

박근영 기자 / 2021년 03월 24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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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엄기백 배우.

인생은 종잡을 수 없는 것이어서 꿈꾼다고 다 이루어질 수 없지만 한편으론 그것을 포기하지 않으면 언제 건 그 꿈을 이룰 시간과 기회가 올 수도 있다. 가정형편이나 부모의 반대, 기타 이런저런 이유로 미뤄두어야 했던 공부나 예술 활동을 중년이나 은퇴 후에 찾는 사람들을 보면 성취도를 떠나 그 간절함을 엿볼 수 있다.

‘돈키호테 피디’로 유명한 엄기백 감독도 그 중 한 명이다. 명성 높은 KBS드라마 피디와 KBS드라마의 산실인 수원 드라마 센터 센터장, 경주문화재단사무처장 겸 예술의전당 관장 등 남들이 보기에 모든 꿈을 이루었을 것 같은 엄기백 감독은 실상 꿈을 접은 채 평생을 산 사람이다. 그런 그가 바야흐로 청춘기에 가졌던 ‘배우’로의 꿈을 실현하기 위해 ‘맨땅’에 섰다. 동국대학교 연극영화과를 다니며 배우의 꿈을 키웠던 젊은 시절의 엄감독이 꿈을 포기하고 연출자로 돌아선 이유가 있었다.

“사투리가 심했던 탓입니다. 당시에는 경상도 사투리 쓰면 아무도 써주지 않았어요. 알다시피 그걸 고치기가 거의 불가능하잖아요”

대학 다니면서 경주말로 대본을 만들고 연극도 했지만 당시의 냉엄한 프로 세계는 ‘다름’을 인정하지 않았다. 숫제 대놓고 연기자로 성공할 수 없다는 말로 가슴에 비수를 꽂은 교수도 있을 정도. 어쩔 수 없이 연출을 택한 엄기백 감독은 그 후 40년 동안 연출자로서 자신이 동경한 세계를 누볐을 뿐이다.

“2003년 영화 ‘황산벌’이 처음 나왔을 때, 대학시절 제가 만든 연극이 이런 식의 기획이었다는 생각에 얼마나 신기했던지 모릅니다. 드디어 다름을 인정하고 그 다름으로 작품을 만들 수 있는 시기가 된 것이지요. 그 후 지방색 드러난 영화나 드라마 같은 것들이 마구 쏟아져 나왔지요. 심지어 공중파에서 사투리 쓰는 연예인들을 간판 진행자로 내세우는 것도 서슴지 않았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연기자로 돌아갈 수 없었던 것은 그가 생활인으로 부양해야 할 가족들이 있었고 배우로 돌아섰다가는 자신이 잡고 있었던 많은 것들을 포기해야 하는데 쉽게 모험할 수 없었기 때문이라 고백한다.

“아직도 가족들은 저를 향해 ‘해보고 싶은 대로 다 하면서 자유롭게 살았다’고 생각할지 몰라요. 남편으로, 아버지로 산다는 것은 저에게도 쉽지 않은 일이었어요. 작업의 특성상 연기자들의 스케줄을 맞춰야 하고 시간적인 속박이 늘 따라 붙다보니 야간작업도 많았지요. 마치면 연기자·스텝들과 어울려 회식도 해야 했고... 이런 내막을 일일이 말할 수 없지요.

배우에 대한 엄 감독의 열망은 실상 해묵은 소원이었다. 엄 감독을 처음 만나 인터뷰한 것이 KBS수원 드라마 센터장으로 활약하던 2005년. 당시 엄 감독의 꿈이 고향 경주로 돌아가 경주에서 작은 극장을 지어 연극이건 뮤지컬이건 마음껏 해보는 것이었다. 거기에는 당연히 연기자의 꿈도 포함돼 있었다.

↑↑ 단역으로 다시 꿈꾸기 시작한 엄기백 배우.

-“작은 배역은 있지만 작은 배우는 없지요” 거장 옷 벗고 공개 오디션 참가해 단역배우 획득

그 꿈이 2011년 경주문화재단 사무처장 겸 경주예술의전당 관장으로 재직하며 일부나마 이루어지나 싶었지만 짧은 임기로 그 꿈을 이루기는 힘들었다. 2013년부터 경주시립극단 예술감독으로 활약하며 작품활동한 것이 오히려 꿈의 일부나마 이룬 일일지도 모른다. 세간의 화제를 일으킨 동리탄생 100주년에 맞춰 제작된 뮤지컬 ‘무녀도 동리’는 그 꿈의 한 조각. 그러나 역시 연기자, 배우를 향한 자신의 꿈과는 거리가 멀었다.

엄 감독이 배우로 꿈을 키우겠다고 본격적으로 벼르기 시작한 것은 이런저런 사회적 타이틀에서 완전히 물러나 더 이상 사람들이 자신을 주목하지 않았을 때부터다. 자신의 영향력이나 힘을 쓰지 않는 범위에서 오로지 ‘배우 엄기백’으로 시작하고 싶다는 열망을 그때부터 공공연히 말하고 다녔다. 경주시립극단 예술감독 퇴임 후 2019년 ‘예슈아’, 2020년 10월에 자신이 반드시 연출하고 싶어한 ‘천로역정’을 재해석한 ‘A dream’ 등 내면을 울리는 작품을 내놓았을 때 기자의 관심사는 과연 이번 작품에는 ‘엄기백 감독이 직접 출연하는가?’였다. 그러나 대답은 ‘No’. 연출자인 자신의 본분을 어겨서는 안 된다는 신념 탓이다.

그런 그가 마음 단단히 먹고 공개 오디션에 참가해 본격적인 배우로 시동 건 작품은 2019년 8월, ‘악인전’을 연출한 이원태 감독의 ‘대외비’라는 작품이다. ‘배우 엄기백씨’의 말로는 ‘대사까지 있는 임팩트 있는 단역’!!

KBS 유명 PD로 TV문학관을 비롯, 드라마와 연극, 뮤지컬, 악극 등 50편 가깝게 연출하며 수원드라마센터장까지 역임한 연예계 거물이 공개 오디션을 통해 단역을 맡았다는 사실에 대해 정작 당사자인 엄기백 감독은 당연하다는 반응이다.

“이 나이에 연기하려는 내 진심이 정확하게 어필됐고 그들이 원하는 바에 맞았을 뿐입니다”

‘엄기백 감독은 작은 배역은 있지만 작은 배우는 없다’는 말로 영화에서 자신이 맡은 역할이 얼마나 중요한지를 간명하게 설파했다. 그러나 워낙 연예계 유명 인사이다 보니 본인의 의사와 상관없이 불편한 일도 자주 일어난다.

“감독이나 조연출, 다른 배우들이 나를 예우해주려고 할 때마다 얼마나 곤혹스러운지 모릅니다. 나는 단역 배우일 뿐이니 그에 걸맞은 대우가 당연한데 말이지요”

그러면서도 한편으로는 오랜 기간 연출해온 자신의 경험 상 아무리 작은 배역이라도 감독이 무엇을 원하는지 알아차리는 센스는 남다르다며 ‘그 덕분에 대사 없던 단역에 대사까지 넣어주더라’는 깨알자랑도 한다. 경주출신 손기호 감독이 연극과 동시 연출한 독립영화 ‘나는 지금 나를 기억한다(2019)에 단역으로 출연한 것도 인상적이다. 이 경우는 녹화한 분량에서 ‘뭉턱 잘려나간’ 경우지만 자신의 캐릭터를 인정하고 기꺼인 써준 손감독에게 고마울 뿐이라고.


-생활인으로서 절절히 깨우친 무참한 실패의 경험···, 압축된 아픔, 어둠의 세월을 단축된 시간으로 절절히 느껴

경주를 떠난 엄기백 감독의 행로는 다양하기 이를 데 없지만 한편으로는 팍팍한 삶이 때늦게 그를 연단하기도 했다. 자신의 인생을 하나하나 수필로 정리해가고 있는 엄기백 감독은 2013년 격월간 수필집 ‘에세이스트’를 통해 수필가로 등단하고 2년 후에는 400여명 수필가들을 대표하는 회장직도 맡아 봉사했다.

그러나 아직은 야심차고 혈기왕성한 시기, 경제활동을 하지 않을 수 없어서 태어나 처음으로 연기 외적인 일에 도전했음을 밝혔다.

“연출이나 연기는 꾸준한 돈벌이는 안 되잖아요. 무언가 생산적인 활동을 찾다가 2008년 유럽 배낭여행에서 본 파리의 빵집 노부부가 인상적이어서 2013년 장기간 남의 가게에서 실습하며 창업의 꿈을 키웠습니다”

그러나 이 분야 젊은 사람들의 엄청난 도전에 기죽어 포기했다.
이럴 때 마침 후배의 소개로 논현동 사거리에 차려진 모델하우스에서 ‘평택 오피스텔 분양’에 참여하게 되었다. 생소한 분야지만 누군가에게 꿈을 줄 수 있다는 생각에 열정적으로 뛰어들었다.

“이 일 하면서 계약고가 없어 인간적인 모멸감을 당했고 고객이 남발하는 뻔한 거짓말 약속과 그들이 내지르는 트집과 모욕을 견디기도 했습니다. 그런 한편 소주잔 기울이며 들은 선험자들의 조언과 동료들의 노하우로 나도 모르게 ‘꾼’이 되어가고 있었어요”

그러나 문책성 언어폭력, 출근과 동시에 행해지는 유치한 구호, 소신 발표를 가장한 인신공격, 계약고가 없는 사람들에 대한 무차별적 매도, 두발과 용모까지 걸친 간섭, ‘절이 싫으면 중이 떠나라!’는 비정함에 숨 쉬기조차 힘든 날들이 6개월간 이어졌다.

“한 건이라도 올리겠다는 오기에 야비하고 또 비겁해지고 있었어요. 그런데 그로 인한 스트레스가 드디어 가족을 슬프게 또 아프게 하고 있음을 깨달았습니다”

늘그막의 왕성한 모습에 응원하던 가족들이 조심스럽게 다가와. “충분히 하셨습니다. 이제 좀 쉬세요”라고 했을 즈음 광주시립극단 예술 감독인 후배가 방문해 연출을 부탁하며 엄 감독이 스스로 밝힌 ‘부끄러운 흔적, 오염된 인내만 습득한 시간’이 마무리 되었다.

너무 어이없고 부끄러운 일이라 일체 비밀로 부쳐둔 일이었다. 그러나 이 역시 자신의 인생이고 어쩌면 이 쓰라린 경험을 통해 사회 저변 숨죽인 고통 속에 있었던 자신을 겸허히 인정하는 모습에서 또 다른 깊이의 성찰이 느껴졌다. 늘 성공가도를 달려왔던 그가 어쩌면 지극히 당연한 돌부리에 걸려 무참히 넘어진 사건을 통해 압축된 아픔과 어둠을 단축된 시간으로 절절히 느꼈을 법하다. 이 사건을 수필을 통해 담담히 관조한 엄기백 감독의 마음이 연기를 통해 표현된다면 우리는 또 다른 명배우를 만나게 되지 않을까?

“제가 배우가 되고 싶은 이유요? 이제부터라도 정말 저만의 꿈을 이루기 위해 살고 싶어서요. 누구의 남편, 누구의 아버지이기 때문에 하지 못했던 일이었어요. 나이요? 이 나이에 맞는 역할이 얼마나 많겠어요. 그걸 하면 되지요”

‘지금 하지 않으면 영원히 못 한다’는 말을 하며 활짝 웃는 엄기백 감독, 아니, ‘배우 엄기백씨’에게서 70세 어름, 또 다른 청춘의 아름다운 아우라가 물씬 느껴진다. 돈키호테 엄기백 PD는 가고 조연인 산초판자 엄기백, 단역인 로시난테 엄기백 배우가 우리 곁으로 다가온다. 그가 어떤 역할로 나타나건 우리에게는 또 다른 선물이 될 듯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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