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국 최대 규모 ‘무찰수석 카페’ 윤병숙 카페지기

명산대천의 수석들 총집합 초보자부터 고수까지 8천여 명
활발한 활동 하루 방문자 1천명 대

박근영 기자 / 2021년 03월 11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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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윤병숙 선생이 목공방 전시실에서 작품을 들어보이고 있다.

1970년 대부터 1990년대까지 수석(壽石)이 전국적인 붐을 탄 적 있었다. 전국의 명산대천에는 돌 줍는 사람들이 넘쳐났고 어지간한 수석 하나에 그때 당시 금액으로 몇 십 만원부터 몇 천 만원 나가는 돌이 수시로 세상을 떠들썩하게 했다. 심지어 자연석만을 수석으로 인정하는데도 불구하고 몰래 돌의 일부를 가공해 수석이라고 판매하는 사례도 생겼다. 그런 변칙 수석이 횡행하면서 수석열기가 급격히 꺼졌고 수석의 가치도 하락했다.

그러나 수석을 사랑하는 사람들은 돌의 가치와 상관없이 꾸준히 수석생활을 지속해 왔고 인터넷 발달과 더불어 동호인을 중심으로 각종 커뮤니티도 생기기 시작했다. 특히 2010년대 들어 수석에 대한 관심이 다시 커지기 시작해 동호인의 수에서는 이전의 전성기를 뛰어넘을 만큼 수석 열정이 넘쳐난다. 그에 따라 유튜브상에는 수석을 전문으로 채널을 운영하는 전문인들이 등장하기 시작했고 이전의 인터넷 카페를 비롯해 수석 밴드들도 꾸준히 생겨나고 있다.

우리나라 역사와 문화의 원류이자 수도라 할 수 있는 경주는 돌에서도 다른 고장에 비해 특별한 돌이 나는 명석산지로 유명하다. 봉계부터 서천에 이르기까지 분포하는 ‘혹돌’, 안강의 평원석, 남산 주변의 옥석 등이 전국 수석가들의 관심대상이다. 이렇다 보니 경주에도 수석에 관심 가진 사람들이 많고 수십 년 이상 취미생활해 온 수석가들도 여러 곳에서 활동한다.

↑↑ 수석으로 담장을 친 윤병숙 선생의 집.

그 중 대표적인 사람이 우리나라에서 가장 활발한 인터넷 수석동호회 카페인 ‘무찰수석’ 카페를 만들고 관리하고 있는 윤병숙 선생이다.

옥룡암 근처 경상북도 임업시험장 주변 갯마을길에 자리잡은 윤선생의 집은 우선 담장부터 눈에 띈다. 한눈에 봐도 좌대위에 얹어 귀하게 대접할 법한 귀한 수석들로 담을 쳐놓았기 때문. 담 위에는 더 눈에 띄는 돌들이 우뚝 우뚝 솟아나 있어 누가 봐도 수석 고수의 집이란 것을 알 수 있다.

무찰수석 카페는 3월 9일 현재 8042명의 회원이 활동하고 있고 전체적으로 9만6000개 글이 개시된, 현재 우리나라에서 가장 큰 수석카페다. 무찰수석이 시작된 것은 인터넷 카페가 활성화되기 이전부터다. 처음 경주를 중심으로 활동하는 동호인들을 중심으로 시작해 전국 각지역의 동호인들이 참여하며 동호회 홈페이지를 활성화 시켰다. 그러다 네이버에서 카페가 만들어지면서 2001년 4월부로 자연스럽게 네이버 카페 체계로 전환해 지금에 이르고 있다. 무찰수석 카페는 수석의 공간, 수석 나눔의 공간, 수석여행, 수석 전시회, 수석 자료실, 무찰 쉼터, 지역별 동호인 연락방 등 큰 카테고리 속에 80여개 작은 카테고리가 세분화 돼 있어 회원들의 다양한 수석 욕수를 만족시키고 있다.

무찰카페가 인상적인 것은 스마트폰 보급과 함께 인터넷 카페문화가 내리막길을 걷거나 대부분 회원들이 밴드로 옮겨가는 와중에도 굳건히 회원들의 활동이 유지되고 있다는 것이다. 지금도 평일 하루 평균 올라오는 개시물이 30개 내외고 하루 평균 방문자 수가 천여 명에 이른다.

이렇게 카페가 활성환 된 이유는 초보자부터 고수까지 다양한 수석가들이 활동하고 특히 고수들을 통해 돌에 대한 궁금증이 자연스럽게 해소되는 것은 물론 전국 각지의 탐석지가 공유되기 때문이다. 돌이라고 해서 무턱대고 주워온다고 전부 수석이 될 수 없으므로 명석 산지의 정보 없이는 움직여봐야 헛고생이라는 사실이 지금도 초보부터 경력 있는 수석가들이 무찰카페를 찾는 이유다. 오랜 기간 탐석활동해온 수석 고수들은 돌 사진만 보고도 그 돌이 어느 지방에서 나온 돌인지 알 정도여서 초보자들을 지도하고 이끄는 역할을 자연스럽게 해주는 것이 이 카페의 매력이다.

“전국적으로 분포하는 열성적인 회원들이 자신의 정보를 나누어주고 탐석한 돌을 올려 좋은 본보기를 보여줌으로써 초보자들이 나아갈 방향을 제시해 준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아무래도 전성기 때보다는 활동이 상당히 줄었습니다. 자세히 보면 주기적으로 열심히 활동하는 주역들이 바뀌는 것을 알 수 있는데 그게 돌에 대한 열정과 관계있을 겁니다”

지금도 꽤 활동적인데 윤병숙 선생의 말을 빌리면 지금보다 훨씬 활성화 되었다고 하니 그때의 카페는 오히려 가늠하기 어렵다. 그러나 카페 이력을 찾아보면 카페 출범 이후 전국규모 혹은 각 광역단체별 합동탐석활동이 꾸준히 진행되어왔고 수석전시회 역시 전국 혹은 지역별로 해마다 열리는 등 활발한 활동을 확인할 수 있다. 동호인 출품 수석으로 이루어진 ‘달력 만들기 행사’도 2016년까지 지속되었다.

무찰카페가 수석카페인 만큼 개시물 대다수는 단연 전국에서 채집되는 돌이다. 남한강과 북한강의 여러 지류, 동해안 몽돌 밭, 거제도를 비롯한 남해안, 백령도와 선유도 등 서해 도서와 해안, 평창, 포천 등 전국의 토중석 산지에서 캐낸 이름 있는 수석들이 매일 3~40점씩 전시된다. 보고만 있어도 기묘한 전국의 수석들이 한눈에 다 들어오는 꼴이다.

“카페를 만든 것은 전국의 동호인들이 마음 놓고 활동하고 수석 생활을 통해 힐링할 수 있도록 해 주었다는 것에서 작은 보람을 느낍니다”

윤병숙 선생은 수석의 묘미는 수석 그 자체의 탐석활동에도 물론 있지만 그것보다는 수석활동을 통해 전국의 아름다운 풍광과 경치를 누리며 자연 속을 거니는 것에 더 큰 의미가 있다며 수석의 보람을 설명한다.

↑↑ 윤병숙 선생이 카페지기로 활동하는 무찰수석 카페.

-카페 통해 나눔활동도 전개, 30만 원 이상 되면 유니세프에 자동 송금. 목공방 뜨락 운영하며 자연과 함께 삶 영위

여기에 카페를 통해 또 하나 의미 있는 실천을 병행해온 것이 윤병숙 선생에게는 참으로 고마운 일이다. 카페출발과 함께 전국의 동호회 회원들이 십시일반으로 돈을 모아 독거노인, 불우한 외국인 근로자 등 소외된 사람들에게 꾸준히 나눔활동을 해온 것. 수석카페답게 나눔과 봉사에 관심가진 수석가들이 자신의 돌을 ‘수석나눔방’에 올려 입찰을 붙여 기금을 조성하는 식이었다. 지금은 이전만 못해 직접적인 지원을 하는 대신 30만원이 차면 자동으로 유니세프에 후원금이 빠져나가도록 조치해 두고 있다. 다른 어지간한 동호회는 이런 부분에 대해서 전혀 생각하지 않는데 무찰수석 카페가 자발적으로 이런 나눔활동을 한다는 것은 특기할 만한 일이다. 윤병숙 선생은 이런 활동이 가능하도록 실질적으로 카페 관리를 맡고 있는 운영진들에게 그 공을 돌린다.

윤병숙 선생은 최근 들어서는 수석활동보다 목공공방 활동에 더 많은 시간을 할애하는 편이다. ‘뜨락’이라 이름 붙인 목공방은 윤병숙 선생이 소일을 겸해 운영하는 창작공간이다.

“수석이 자연이 만들어 놓은 것을 찾는 작업이듯이 목공은 거친 나무속에 숨은 아름다운 결과 문양을 찾는 작업입니다. 그런 점에서는 수석이나 목공이 서로 통한다고 할 수 있지요. 다만 돌은 자연상태 그대로를 즐기지만 나무는 창작의 즐거움을 줍니다”

처음에는 수석을 위해 좌대를 깎고 수석 올리는 지판을 만들면서 목공예 작업을 시작했지만 작업하는 과정에서 목공예의 매력을 느껴 지금은 생활에 필요한 각종 목기와 가구까지 만드느라 오히려 목공활동에 더 많은 시간을 할애하고 있다는 설명이다. 윤병숙 선생의 집 안쪽에는 꽤 넓은 목공방이 있고 각종 목공 기계와 연모들, 온갖 귀한 나무들이 즐비하다. 목공방 맞은 편에는 작은 규모의 전시장도 마련되어 있어 윤병숙 선생의 목공 작품들이 가지런히 전시되어 있다. 한눈에 봐도 수석의 아름다운 문양처럼 나무판에 화려하게 새겨진 나뭇결과 문양에 눈이 즐겁다. 그런 한편 집 뒤 넓은 밭에는 감나와 소나무 복분자 나무 등을 가꾸며 전원생활의 맛을 즐긴다. 엉뚱하게도 자연이 주는 대로 거둔다는 생각에 농약을 치지 않아 넓은 감나무 밭에서 지난 해 고작 두 상자의 감을 수확했다고.

이렇듯 수석과 나무에 묻혀 사는 윤병숙 선생은 대학에서 역사학을 전공했지만 정작 철학공부에 더 심취해 대학 졸업 후 한 때는 출가해 절에 들어간 적도 있을 만큼 관조적 삶을 추구하고 있으며 지금도 명상과 좌선을 통해 좀 더 바른 삶을 향해 묵묵히 정진 중이다. 경주시에서 공직자로 활동하는 윤병숙 선생은 자신의 닉네임인 ‘무찰’처럼 억지로 무언가를 꾸미지 않는 속에서 물과 모래가 돌을 씻어내고 바람과 햇볕이 나무를 키우듯 자신의 삶을 영위하고 있다. 그런 그가 만든 무찰수석 카페이기에 역시 모나지 않은 좋은 사람들이 어울려 물 흐르듯 자연을 탐닉하고 있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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