특별 초대석-다방면에서 경주를 대표하는 미도교역 이주태 회장

학계, 제계, 정·관계와 사회봉사까지 두루 경지 이룬 출향인

박근영 기자 / 2020년 12월 17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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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주태 회장.

셔블&서울·경주사람들을 연재한 이후 99회를 맞았다. 그간 서울을 비롯한 수도권, 경주와 인근 지역을 망라하며 각계의 인사들을 초대하며 경주와 수도권을 아우르는 중요인사 소개 코너로 자리 잡았다. 100회를 전체 리뷰로 기획하면서 99회 특집으로 미도교역 이주태 회장을 초대한 것은 특별한 이유가 있어서다.

전국을 망라해 경주출향인사들이 포진해 있지만 그 중에서도 서울을 비롯한 수도권에는 신라천년의 기상을 전하는 진취적이고 쟁쟁한 인사들이 다방면에서 활동하고 있다. 학계와 문화계, 정·관계, 경제계, 사회봉사 방면 등 자신의 자리에서 빛을 발하는 인사들이 곳곳에서 활동 중이다. 그 중에서도 이주태 회장은 이런 각 방면을 아우르며 남들은 한 분야에서도 이루기 힘든 최고의 경지를 곳곳에서 이룩해 온 출향인의 모범적 인물이다.

뛰어난 학문적 성과로 한국무역학회 학술상, 자랑스러운 고려대 문과대학인상, 서강대 경제대학원 명예의 전당 헌액 등을 이루었고 산업훈장 2회 수훈과 이탈리아 국가훈장, 베트남 국가공로장 등을 받았다. 대통령 표창, 장관표창, 수출탑 등은 헤아리기 어려울 정도다. 지난 13일 이주태 회장은 서강대 경제대학원 개원30주년을 맞아 명예의 전당에 헌액되는 경사를 맞았다. 경주고를 나와 고려대 영문학과를 졸업한 이 회장이 서강대 명예의 전당에 헌액 된 사연이 있다.

“1990년에 서강대에 우리나라 최초로 경제대학원이 생겼어요. 대학에서 경제관련 강의를 관심 있게 들으면서 이 분야 공부를 해보고 싶어 1기로 지원했지요”

사업하는 사람들이 실용분야인 경영대학원을 보통 택하는 것과 달리 이 회장은 진짜 경제공부를 해보고 싶은 욕구로 경제대학원을 진학했다고 회고한다. 모집 첫 해 이 학과가 인기 있어 전국에서 인재들이 모여들어 엄청난 경쟁률을 보였다고. 뒤에 이 회장은 이 경제대학원의 동문회 회장으로 4년간 봉사하며 동대학원 동문화합과 발전에 기여한다.

대학원 졸업 후 경희대에서 경영학 박사를 받은 이 회장은 경희대에서 겸임교수로 활동하며 ‘무역경영론’과 ‘글로벌경영전략’ 두 과목을 만 10년 동안(미국 워싱턴대에 방문연구원으로 간 1년을 포함) 매년 주당 3시간씩 강의해 학생들에게 큰 인기를 끌었다.

“당시에 그 강의가 100명 넘게 수강하는 인기과목이었지요. 일반 교수들이 대게 학문적으로만 접근하는데 비해 제 강의는 다양한 사업경험과 무역위원회 위원으로서의 공직경험, 업계의 통상외교활동 등에서 우러나온 것이라 학생들이 큰 호응을 보였지요”

이 회장은 학문적 실력과 다양한 현장지식을 기반으로 2005년 한국경제학공동학술제에서 한·칠레 FTA 효과분석 관련 논문을 발표하고 2007년 미국 워싱턴대(잭슨국제대학)에서 한·미 FTA 관련 논문을 발표하는 등 국내외 학술활동으로 한국무역학회에서 수여하는 학술상을 받았다. 특히 국책 연구기관에서 보유한 데이터와 미리 설계된 변수를 통계처리해 보고서를 쓰던 예측치들에 비해 업계 분석을 보강한(1차 자료) 데이터를 구축해 쓴 이 회장의 논문은 통상마찰시 피해 산업액의 예측치와 결과치를 줄이는 측면에서 독창성과 접근방법 면에서 의미 있는 기여를 한 것으로 알려졌다. 국내 주요학회인 한국무역학회의 학술상(영문학회지는 국제학술지)은 학자로서 매우 큰 명예다.

이 같은 기업과 업계, 정부 및 사회봉사에 더해 성실한 학문적 성과에 힘입어 이 회장은 2015년 서강대 경제대학원 총동문회가 실시하는 2015 서강경제대상에 선정되기도 했고 지난 11월에는 서강대 경제대학원이 개원 30주년 기념으로 처음 실시한 명예의 전당 헌액 3인 중 1인으로 당당한 이름을 올렸다.

↑↑ 서강대학교 경제대학원에 헌액된 자신의 사진 앞에서 포즈 취한 이주태 회장.

-정권 망라한 공직활동 및 외교부정책자문, 한국수입협회 회장 맡아 수입 및 통상외교에 대한 인식전환 계기 마련

이 회장은 2005년~2008년까지 3년 임기로 노무현 정부에서 산업자원부 소속 ‘무역위원회’ 비상임 위원으로 활동한 특별한 공직 경력의 소유자이기도 하다. 공정거래위원회가 국내산업의 불공정을 심결하는 곳이라면 무역위원회는 국가 및 국제기업 간 불공정무역 행위를 심결하는 곳이라 국내외에 미치는 파급효과가 매우 엄중한 심판기관이다.

각종 세밀한 심사를 거쳐 장관이 재청하고 대통령이 직접 위촉하는 막중한 자리. 상당한 전문 지식과 통찰력이 필요하고 대외적인 이미지도 있어서 보통 쟁쟁한 학계 법조계 인사들이 이 자리에 선임되는 것이 관례였는데 중소기업인으로서는 이 회장이 처음 위촉된 독특한 이력을 가진 것이다. 특히 당시가 한창 FTA(자유무역협정)와 관련하여 국가간 갈등이 최고조에 이르던 시절이고 이에 따른 로비와 외압도 극심하던 때라 이주태 회장의 노고는 다른 시기에 비해 훨씬 컸었다고 회고한다.

“자칫하면 판정 하나로 인해 국가 간 갈등이 고조되고 어지간한 대기업 사업부 하나가 휘청거릴 만큼 중요한 일들이 하나둘이 아니었어요. 자칫 WTO(세계무역기구)에 제소되면 그로 인한 인적 시간적 손실도 컸고요. 그러니 공정한 심결을 위해 정말 혼신을 다해 관련 자료들을 살피고 각국의 현황과 관련 기업이나 산업 관련 보고서 및 법령을 꼼꼼히 살펴봐야 했지요”

그 결과 이 회장이 출석한 위원회 및 공청회에서의 활약은 정부,학계 등에 깊은 인상을 남겨 후일 이명박 정부 때도 대통령실 정책홍보 자문위원과 외교부 자문위원으로 활동하는 기반이 되었다고 회고한다.

특히 이 회장은 2010년 제 18대 한국수입협회 회장으로 당선되어 우리나라 무역업, 특히 수입업 발전에 지대한 공을 끼쳤다. 이전까지 수출에 비해 수입이 상대적으로 저평가 되던 시절이었지만 이 회장은 경쟁력 있는 가격으로 질 좋은 원자재 및 기계류 수입 없이 건실한 국내산업이 존재할 수 없고 양질의 수입에 기반해서 더 활발한 수출의 활로가 만들어진다는 인식 개선에 힘쓰는 한편 수출강국인 한국에 대한 상대국의 통상마찰 방지활동에 주력했다.

“협회 회장으로 활동하던 때 이명박 정부가 경제외교를 기치로 해외 순방이 많아졌어요. 수입협회 회장으로서 공식 정부사절단에 속해 대통령 전용기로 미주, 아시아, 유럽, 아프리카 등 전 세계를 누비며 국가대계를 위한 통상외교에 일조한 것이 큰 보람입니다”

수입협회장 시절 업계, 학계 및 기업 활동으로 이주태회장은 2006년 석탑산업훈장을 2011년 은탑산업훈장을 받게 된다. 뿐만 아니라 3년 임기 수입협회장에서 물러난 후 이탈리아 정부로부터 오랜 기간 양국통상 발전과 친선의 공을 인정받아 국가훈장을 받기도 했다. 회장 재임시 회원 간 오랜 대립 구조를 해결하고자 특유의 화합력을 바탕으로 협회의 발전에 매진한 결과 심지어 수입협회장 선거 당시 그와 경쟁했던 후보조차 나중엔 그의 팬이 되었다며 너털웃음을 짓는다.

↑↑ 경주중고등학교 서울동창회 2017년 송년회에서 인사하는 이주태 회장.

-학문적 열정과 사회봉사가 좋아 스스로 한계를 설정한 사업. 후배들, 동문회와 출향인 모임에서 세월 뛰어넘은 미래 자신 찾기를…!

사업적인 부분에서 이주태 회장은 스스로 한계를 긋고 그 힘을 학문과 봉사시간에 나눈 특별한 기업가이기도 하다. 이 회장은 대학 졸업 후 지금의 SK그룹 무역회사인 ‘선경’과 삼성물산 등에서 5년 간 이른 바 ‘상사맨’으로 근무한 후 퇴직하고 지인의 추천으로 미국 오리건 소재 KC-인더스트리사로 스카우트되어 현지에서 마케팅 코디네이터로 활동하기도 했다. 이렇게 짧은 한국과 미국에서 직장생활을 한 후 이 경험을 바탕으로 1986년 미도상사를 창업하고(나중 미도교역으로 법인화) 무역업에 뛰어 들었다, 처음에는 특정품목에 집중하지 않고 이것저것 품목을 가리지 않고 수입했으나 한 고향 선배를 통해서 섬유직물 원료인 면사, 나일론사 수입을 자문 받으면서 원사 아이템에 집중하게 되었고 오늘까지 이르게 된다.

“처음 원사를 수입할 무렵 우리나라 섬유업은 양적으로 성장했지만 지금은 특수 섬유 등 질적으로 상당히 발달했어요. 시장의 특성을 제때 파악하고 수입시장을 다변화 하면서 이 분야를 선도할 수 있었지요”

이 회장은 그러나 한창 사업에 집중할 무렵에도 학구열과 업계, 사회 봉사에도 관심을 가졌던 것으로 회고한다.

“성공여부를 떠나 그때 사업에만 전념했다면 어쨌거나 좀 더 다양한 사업을 했거나 사업규모를 훨씬 더 넓힐 수 있었을 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러나 사업이 어느 정도 안정되었다고 믿으면서부터 학문적 열정과 업계활동에 더 관심이 갔습니다”

이 회장이 얼마나 공부에 ‘미쳐’ 있었는지를 보여주는 일화 하나. 이 회장은 사업을 한창 영위하던 1996년 서울대학교가 파리정치대학원과 협력해 개설한 ‘파리정치대학원’에 국내 유명인사들과 입학하면서 1년간 파리와 서울대학교에서 수업과 논문을 통해 최우수졸업생으로 전문학위(DIPLOMA)를 받는다. 이 후 파리8대학 정치학과의 박사과정에 합격하고 등록까지 했으나 먹고사는 가장으로서 결국 포기하고 대신 경희대에 경영학박사학위 과정에 입학한다. 입학 후 논문제출 필수과목으로 영어와 제2외국어로 불어를 선택하여 시험에 합격했는데 40대 나이에 두 과목 모두 통과한 경우가 이 후로도 첨이 아닌가 생각된다.

스스로 공부가 좋아 한계를 설정했다는 사업이지만 사업규모가 적지도 않다. 중견기업으로 년 매출 규모가 7백억 원 규모가 될 만큼 국내 수출입시장에서는 적지 않은 비중이다.

지난 2015에는 서울 근교에 3천 평 규모의 물류창고도 개장했는데 그 넓은 창고를 자신의 미도교역 물량으로 다 채우고 오히려 모자라 경산에 제2물류창고를 다시 열었으며 2개 관계사를 갖추고 있을 정도다.

이 회장은 사회봉사활동에도 누구보다 적극적이다. 자신의 모교인 경주중고와 고려대, 서강대 경제대학원, 경희대 박사과정 등 학교의 동문회는 물론 예의 수입협회에 이르기까지 이 회장은 이들의 화합과 발전을 위해 오랜 기간 특별한 관심과 협조를 기울였다. 단순히 회원으로 활동하거나 형식적인 회장단에 머물지 않고 이들 대부분에서 회장을 맡아 물심양면으로 솔선수범해왔다.

이중 2016년에 맡은 제 27대 경주중고 서울동창회 회장직은 공교롭게 직전 회장이 친형인 이지태 회장이었기에 고사를 거듭했으나 동기회와 동창회를 막론한 주변의 간곡한 바람으로 회장에 추대되었을 정도다. 회장을 맡은 그는 동창회 재원을 안정시키고 젊은 동문들의 동창회 참여를 유도하며 동창회 중흥에 괄목할 기여를 했다. 그런 이주태 회장에게 이처럼 다방면에서 성공적인 활동을 할 수 있는 비결을 물었다.

“글쎄요. 저를 믿어준 가족과 열심히 일해 준 회사 직원들 덕분이 아닐까요? 기본적으로 사업을 하면서 일찌감치 안정을 찾을 수 있었던 것이 다른 일을 할 수 있는 운과 여유를 주었습니다”

이 회장은 젊은 시절에는 무슨 일이건 최선을 다하고자 노력했고 중년 이후에는 무리하지 않고 주변과 화합하고 조화롭게 참여했을 뿐이라며 다방면의 성공에 대해 겸양한다. 그런 그가 한때는 젊은 열정과 주변의 적극적인 권유로 정치에도 관심을 가진 적 있었으나 그 분야만큼은 자신의 길이 아니라고 판단, 길 자체에 들어서지 않았다고 회고한다. 처음 본지의 인터뷰를 요청했을 때 정중히 사양하기도 한 이면에는 이런 고심이 있었던 것이다.

이 회장은 젊은 후배들, 특히 서울에서 활동하는 후배들에게 어떻게 하든 고향선후배들이 모이는 동창회나 향우회에 관심을 가지고 참여할 것을 당부한다.

“개인주의적 경향이 대세이고 그게 나쁜 것은 아니지만 선배들에게서 세월을 뛰어넘어 자신의 모습을 찾을 수 있습니다. 좋은 일이건 나쁜 일이건 타산지석으로 많이 배울 수 있지요”

중고 시절부터 평화봉사단으로 경주에 와 있는 미국인들에게 영어를 배운 덕분에 남다른 행운이 있었고 그로 인해 어린 시절부터 개방된 국제적 시각을 가질 수 있었다는 이주태 회장은 그런 만큼 경주가 신라 때도 국제도시고 자신의 추억에서도 다른 도시와는 차별화된 국제도시였다고 평가한다. 지금은 또 다른 차별된 국제화를 위해 준비하는 시기라 믿는 만큼 경주의 정치 지도자나 경주시민들이 보다 넓고 개방된 마음으로 경주를 이끌어주기를 희망한다.

언제나 마음의 고향인 경주를 품고 지금도 세계를 향해 언제든 달려 나가는 이주태 회장은 우리 시대 신라인, 타고난 세계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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