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주를 찍는 사진작가 이정환 선생, ‘돌’의 영속성과 삶의 터 ‘논’이 가장 큰 주제!

친구따라 시작한 사진작업 취미 넘어 평생 업으로…

박근영 기자 / 2020년 12월 03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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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사진 작가 이정환 선생

2020년대가 시작하고 벌써 한 해가 지났다. 10년이면 강산도 변한다는데 우리 시대의 10년은 강산 아니라 세상이 다 바뀔 정도다. 특히 인터넷 세상은 경천동지라고 할 만큼 종잡을 수 없이 빠른 속도로 달라진다. 이 급변하는 세상을 기록하고 남겨 놓을 수 있는 가장 효과적이고 단순한 방법이 무엇일까?

어쩌면 사진작가 이정환 선생은 이런 고민으로 셔터를 누르는지 모른다. 특히 최근 페이스 북에 올라오는 이정환 선생의 사진은 그 자신 살아온 우리의 오랜 과거와 가까운 어제를 2020년 오늘의 시점에서 치열하고 장중한 깊이로 찍는다. 흑백사진이 주는 무게감이 컬러풀한 세상살이를 돌고 돌아 이제야말로 쌓은 경륜을 세상에 내놓듯 은근한 힘을 주는가 하면 60대로 한창 진입한 작가가 자신이 사랑하는 자연과 인생의 깊이를 화면에 쏟아내는 듯하다.

“최근에 돌과 논, 두 주제를 정해서 사진작업을 하고 있습니다. 한때 저를 가르쳐 주신 김성민 교수님이 제 주변에서 5분 이내에 갈수 있는 곳을 주제로 삼아라는 말씀도 해주셨는데 이제 그런 작업을 하는 듯합니다”

이정환 선생이 돌과 논을 택한 것에는 나름의 이유가 있다. 경주는 곳곳에 탑이 많아 한때는 탑을 주로 찍기도 했지만 보다 근원적으로 돌이라는 ‘영속적 매개체’에 대한 관심이 생기더라는 것. 특히 돌과 함께 돌담길을 매우 중요하게 여겨 작업하고 있다. 돌담길에서 만난 돌은 사람의 얼굴모양일수도 있고 각종 기하학적 문양을 안고 있고 울퉁불퉁 갖가지 형상으로 박혀 있어 그 자체로 다양한 소재를 준다고. 문제는 경주만 해도 그런 돌담길이 차츰 사라지고 천편일률적인 돌담으로 바뀌는 것. 이전의 찰흙 이긴 돌담길이 사라진 것이 안타깝다는 선생이다. 논에 대한 이정환 선생의 상념도 멋지다.

“수로를 따라 논물을 채워 가는데 내 논에 적당한 물이 차면 수로를 막아 필요 이상의 물을 막아버리지 않습니까? 사람의 노력이 아무리 간절해도 결국 논의 풍년은 하늘에서 내리는 햇빛과 비에 달려있지요”

요컨대 인간의 삶의 터가 논이기에 논에서 일어나는 다양한 생명체들의 변화를 사진 속에 담는 것은 사람과 자연의 막중함을 담는 것과 상통한다고 보는 것이다.

그러면서 선생은 경주의 다양한 모습을 앵글에 담는 것 또한 소홀하게 여기지 않는다. 집에서 5분 거리가 모두 경주의 다양한 유적지요 자연이기 때문이다. 남다른 깊이를 가진 이선생의 카메라에 담긴 경주의 이곳저곳은 그 자체로 경주를 신비롭게 알리는 첨병이고 그가 찍는 꽃 한 송이, 풀 한 가닥, 나무 한 그루는 심오한 예술로 승화된다. 이 선생의 사진작품이 전국 각지의 페부커들에게 많은 인기를 끄는 것은 작품에서 드러나는 특별한 포착과 피사체와 주변을 차별하는 놀라운 촬영기법이 사람들의 마음을 훔치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런 인기에 대해 이선생은 스스로 경계심을 가지기도 한다.

“사진 배울 때 인기에 연연하는 것은 사진작업의 독이라고 배웠어요. 그래서인지 제 나름대로 조금 심오한 고민으로 찍은 작품은 사람들이 거들떠보지도 않더라고요”


-경주는 유적뿐 아니라 시민들도 관광자원이 되어야 합니다. 그래야 더 다양한 관광객들과 소통할 수 있지요!!

사람들의 반응을 이야기하며 이 선생은 한편으로는 사진에 대한 사람들의 냉소적 거부감에 대해서도 개탄스러워 한다. 본래 이정환 선생은 사람 사진 찍는 것을 가장 즐겨하고 의미 깊게 생각해왔다. 모든 예술의 시작과 끝은 사람에서 시작해 사람으로 완성되고 그것이 역사라는 철학 때문.

“유감스럽게도 전 세계에서 우리나라 사람들이 초상권 문제에 대해 가장 민감합니다. 섣불리 좋은 사진이라고 해서 사람 사진을 올렸다가는 언제 어느 순간에 법적 시비에 휘말릴지 몰라요. 우리나라에 오는 사진가들은 그래서 숫제 ‘한국에 가면 카메라를 버리고 가라’고 말한답니다”

실제로 이정환 선생은 뜻 맞는 경주의 동료 작가들과 함께 중앙시장 풍경을 사진으로 담고 그것을 전시하는 기획을 한 적 있지만 상인들의 거부감으로 인해 성사되지 않았다고 아쉬워한다.

또 황리단길이 유명해지기 전부터 황남동 길을 열심히 찍었는데 그 속에 사람이 들어 있으니 사진을 공개할 수 없었다며 경주는 문화유산과 자연 못지않게 시민들 스스로 관광자원이 되는 것에 거부감을 가지지 않아야 훨씬 더 다양한 관광객들을 오게 할 수 있을 것이라며 소신을 밝히기도 한다.

이정환 선생은 미술대학에서 그림을 전공한 화가 지망생이었다. 그런 그가 사진에 빠진 것은 마침 국내 유일 사진학과가 있던 중앙대학교에 친한 벗이 들어가면서부터였다고. 친구 따라 해 본 사진 작업이 너무 재마있어 그길로 틈틈이 사진을 배운 게 결국 전공한 친구보다 더 열심히 사진 찍는 계기가 됐다고.

“당시에 대학에서는 현대적 기풍의 다양한 시도들을 가르쳤는데 제가 찍는 사진은 주로 마당에 널린 고추와 초가지붕 따위였어요. 누가 가르쳐주지도 않았고 시골 살면서 보는 것도 없었고요”

그러다 우연히 친구들 작품 작업할 때 선생의 사진을 본 교수가 ‘자네는 그 길로 쭉 가면 되겠네’라고 인정해주어서 자신감을 가지고 자신의 작업에 몰두했다고 술회한다.

이정환 선생은 그러나 대학 졸업 후 미술대 특기를 살려 풍산 금속 디자인 부서에 입사해 직장생활을 하다 여러 가지 변화로 스스로 풍산금속을 사직, 1993년 친구와 함께 경주에서 ‘금호칼라’ 스튜디오를 개업해 몇 년간 사진관 사업도 했다. 결국 잘하는 일을 직업으로 가진 것.

“당시 사진관 차리려면 3000만원 정도면 너끈했는데 온 집안을 들어 빚을 내 최고급 카메라와 최고급 조명기 등 무려 1억8천만 원짜리 스튜디오를 차렸습니다”

그 정도로 프로의식도 남달랐다는 반증이다. 그러나 사업경험 부족과 다소 고집스런 사진철학으로 인해 오래 운영할 수 없었다. 예를 들어 고객이 자신이 원하는 대로 사진을 보정해주지 않는다는 등의 불만을 제기하면 ‘그럴 거면 최진실 사진을 붙여서 이력서를 쓰라’고 맞서는 고집스런 고객대우로 사진관을 오래 운영할 수 없었다고.

“나중에 알고 보니 서울의 스튜디오들은 메이크업까지 함께 하고 있더라고요. 또 조명을 좀 나쁘게 쓰면 얼굴이 발거래 하게 보여서 잘 나온 것 같았고요. 그런데 그걸 어떻게 일부러 그럼니까?”


사진관을 친구에게 맡기고 그만 둔 뒤 이정환 선생은 재활센터에서 센터장으로 일하는 친구의 부탁으로 현장일을 맡아서 하게 되며 건축쪽 일을 하게 되었고, 2007년 본인 명의의 건축회사를 차렸다. 그러다 2012년 한수원 일을 맡으면서 사회적 기업으로 등록한 것이 지금의 ‘㈜사랑의 집수리, 망치와 벽돌’이라고 소개한다. 업무상 주로 경주시와 한수원, 각 복지 기관에서 발주하는 일이라 어깨가 무겁지만 오랜 기간 현장직원들이 주어진 한도 내에서 최대한 잘 지어주겠다는 생각을 공유하고 있어 고맙다고.

이정환 선생은 최근에는 사진 작업만큼 사진 주제를 글로 쓰고 사유하는 작업에도 충실해졌다. 사진이 주는 미학과 글이 주는 철학이 조화를 이룰 때 보다 깊은 울림의 사진을 찍을 수 있다고 믿기 때문이다. 이정환 선생의 페이스북에는 그런 과정을 거친 작업의 결과들이 올라와 경주를 더 다양하고 풍부하게 세상에 알리고 있다. 스스로 아마추어 사진작가라 몸을 낮추지만 알 만한 사람들은 다 인정하는 최고의 사진작가이기에 그의 페이스 북에는 오늘도 많은 인터넷 관객들이 쉴 새 없이 북적이며 ‘좋아요’를 누르고 있다. 설혹 선생의 작업에는 독일지 몰라도 경주로선 복된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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