토기에 실은 혼, 배용석 명장-독학으로 신라토기 재현, 현대적 감각의 작품으로 승화

신라토기는 소나무로 불을 떼야 그 모습을 온전히 재현할 수 있어

박근영 기자 / 2020년 11월 19일
공유 / URL복사
↑↑ 토기 제작의 어려움을 설명하는 배용석 명장.

본지 1463호 ‘첨성대 칼럼’ 현곡 연세의원 박만호 원장이 쓴 글에 토기의 효용성에 대한 글이 올랐다. 토기의 과학성과 효과가 잘 나타나 있었고 기술 보존의 필요성도 강조되어 있었다. 특히 토기장인 배용석 명장에 대한 짧은 소개가 올라와 있어 눈길을 끌었다. 배용석 명장으로부터 토기의 요체를 배운 박만호 원장은 우리 토기의 우수성으로 첫째, 다공질로 공극(空隙)이 엄청 많아 안팎으로 숨 쉬고 살아있는 그릇이다. 둘째, 음식을 담아 놓아도 평균 1주일 정도는 변성이 되지 않는다. 물을 채워 놓으면 평균 2주간은 그대로 맑고 비린내가 없다. 셋째, 랩 비닐(Wrap Vinyl)을 토기 잔 위에 붙이면 절대 안 붙는다. 도기(陶器)나, 자기(瓷器), 일반그릇에 랩을 붙이면 붙는다 등 자신이 직접 경험하고 실험한 내용을 기술했다. 신문이 나온 후 박만호 원장과 통화하면서 배용성 명장을 소개해 달라 부탁했다.

-수 백 번 실험 거쳐 신라 토기 재현에 성공. 완숙해지고도 역시 토기 제작은 어려워 !!
배용성 명장은 할아버지 때부터 3대째 옹기를 구웠다. 그런 그가 토기를 접한 것은 19세 때 장티푸스를 앓으면서부터였다. 당시 제일약방의 박동하 선생이 교회에 나가면 병이 낫는다고 해서 교회에 가던 중 근처에 있는, 당시 경주부 동헌에 차린 박물관에서 토기를 보게 된 것이다. 옹기만 굽던 청년에서 토기는 완전히 새로운 신천지로 보였다.

“저는 신라 토기들이 흙이 아니라 쇠로 만든 것으로 알았습니다. 그 만큼 제가 만들던 옹기와 달라보였던 것이지요”

그때부터 배명장은 박물관을 들락거리면서 진열장 속에 전시된 토기를 옹기가마에서 흉내 내기 시작하면서 자신도 모르게 토기작업의 첫발을 내디뎠다.

“얼마나 자주 박물관을 들락거렸는지 수위들이 ‘저 놈이 뭘 훔치러 왔는지도 모른다’ 싶어서 곁에 붙어 감시하기 시작했습니다”

청년 배용석은 옹기터에 돌아오면 흙으로 박물관에서 본 토기 모양을 따라 만들어 옹기 근처에 둘러놓곤 했다.

‘필연은 준비된 우연에서 시작한다’고, 바로 그 습작 토기를 당시 경주국립박물관 황수영 관장이 건천에 있는 신선암을 왔다갔다하면서 눈여겨보게 되었다. 토기에 대한 배용석 청년의 관심을 알게 된 황수영 관장은 당장 박물관 수위들에게 특명을 내려 이후로 토기를 관찰하는 청년을 감시하지 않도록 조치했고 심지어 진열장을 열고 토기를 꺼내 만져볼 수 있는 특권까지 주었다.

“그러나 이걸 어떻게 만드는 지에 대해서 누가 가르쳐 주는 사람이 있어야지요. 경주 인근에 도기 굽는 사람이나 옹기 굽는 사람들은 더러 있었지만 그 당시 제가 아는 범위에서 토기 굽는 사람은 전혀 없었어요”

때문에 배용석 명장은 수백 번의 시행착오를 거쳐야 했다. 말이 쉬워 단순히 수백 번의 과정이지 일일이 형을 만들고 불을 떼는 과정이 보통 어려운 게 아니었다고.

“토기가 도기보다 어려운 것은 영락(瓔珞)이나 고리, 바탕의 무늬와 긴 목, 목에 내는 투창,특별한 물형, 심지어 관(管-Tube)을 만들어야 하고 소리 나는 방울을 만들기도 해야 합니다”

그렇게 정성껏 형태를 만들어도 가마에서 형이 주저앉아버리거나 색깔이 영 엉망으로 나오면 낙담하기 일쑤였다고. 심지어 토기 재현이 완숙해지고 나서도 가마 작업시 ‘아차’ 하는 순간의 방심으로 오래고 공든 작업이 수포로 돌아갈 만큼 토기 제작은 언제나 까다롭고 어렵다며 고개를 내젖는다. 그러나 조금씩 자신이 만든 토기가 박물관 토기와 닮아간다는 것을 느끼면 느낄수록 토기 재현에 대한 열정을 더 불타올랐다.

그 과정에서 토기를 재현하기 위해서는 어떤 흙들을 섞어서 사용해야 하는지, 불은 어떻게 떼야 하고 어떤 나무로 떼야 하는지, 가마 온도는 몇 도를 유지해야 하고 언제 가마를 막아야 하는지 등에 대한 세밀한 데이터들을 가질 수 있었다.

“안강의 노당과 내남 노곡, 영천의 방정에서 나는 점토를 섞었을 때 가장 이상적인 토기를 구울 수 있다는 것을 알아냈습니다”

노당 점토는 견고한 힘이 있어 형을 만들기 쉽고 노곡 점토는 좋은 색을 낼 수 있었고 방정 점토는 구웠을 때 토기를 강하게 만들어준다는 것을 안 것이다. 신라토기는 소나무로 불을 떼야 그 모습을 온전히 재현할 수 있다는 것도 알았다.

“천천히 온도를 높여서 1300까지 구우면 강질의 토기기 되고 소나무에서 나온 진액이 토기에 달라붙어 유약 바른 것처럼 맨질맨질해집니다. 그런데 이건 유약과 전혀 상관없이 오직 가마 속에서 불 떼는 과정에서 자연스럽게 달라붙는 천연 유약입니다”

참고로 박물관에 모셔진 녹유 사천왕상을 보면서 녹색 유약을 발랐다고 오해하는데 사실은 싸리나무와 소수리 나무를 고열로 떼면 그런 녹유가 가마 속에서 자연스럽게 착색되는 것이라고 설명하기도 한다.

배영석 명장이 나름대로 자신 있게 토기를 재현했다고 자부하는 시기가 1980년대 어름이었다. 1940년생인 배용석 명장이 19살 무렵에 토기재현을 시작해 20년 간 온갖 고생을 다 한 끝에 마침내 독자적으로 토기재현을 이룩한 것이다. 이 과정에서 토기가 출토되거나 전시된 전국의 박물관을 다 돌아다닌 것은 말할 나위도 없다.

↑↑ 보산토기.

-민속공예촌에서 보산토기 운영하며 작품 활동, 제자들 토기 포기하고 자기에 매달리는 것 안타까워 !!

배용석 명장은 신라토기 재현에도 심혈을 기울여 차곡차곡 박물관에 전시된 것과 유사한 고유의 토기들을 제작해 나갔다. 신라의 능과 경주 인근의 산들에서 출토된 골호(骨壺-뼈항아리)와 등잔모양 토기, 동물문양 토기, 뿔 모양 토기 등 무수한 이형토기(異形土器)를 거쳐 마침내 금령총에서 출토된 국보 제91호 기마인물형 토기까지 완벽히 재현하는데 성공했다. 이런 공로를 인정받아 1991년 정부로부터 토기명장에 선정되기도 했다. 그런가 하면 상업적으로도 성공을 거두었다.

“토기제작이 본격적으로 시작되었을 때 의외로 서울의 대형 꽃집들이 화분제작을 의뢰해 왔습니다”
당시에는 흙으로 만든 붉은 색 화분밖에 없었는데 토기를 본 꽃집 상인들이 앞 다투어 토기로 만든 화분을 주문하기 시작했다는 것이다. 이로 인해 여러 명의 직공을 뽑아 작업량을 늘렸고 적어도 매월 한 번씩은 가마작업을 할 만큼 호황도 누렸다. 무엇보다 1986년 경주 보문에서 불국사 가는 길인 보불로에 민속공예촌이 생기면서 ‘보산토기’라는 공방을 열고 국내외 관광객에게 신라토기는 물론 재현된 배용석 명장표 토기의 우수성을 마음껏 알리기도 했다.

배명장의 토기는 의외로 일본인들 사이에서 훨씬 더 많은 인기를 끌었다. 1999년 일본에서 전시회를 열었을 때 배 명장의 토기 작품이 100~180만 엔에 판매되었다. 지금 그렇게 판매돼도 보통 가격이 아닌데 지금보다 화폐가치가 3~4배 높았던 당시로는 파격적이었다. 일본에 대해 태생적 거부감을 가지면서도 자기나 토기 등에 대해 높은 관심을 가지는 일본인들에 비해 우리는 상대적으로 이런 관심이 덜 한 것은 토기명장으로서 아쉬울 수밖에 없다.

배용석 장인은 토기의 재현에 그치지 않고 토기를 자신의 작품으로 승화시키는 작업에도 소홀하지 않았다. 특히 토기에 관심을 가진 다방면의 사람들이 자신들이 원하는 토기를 제작해 달라는 주문을 해오면서 현대적 감각의 토기를 만드는데 큰 힘이 되었다고 회고한다.

그러나 토기의 전성시대는 그 작품성과 효용성에 비해 오래 가지 못했다. 급속한 산업화로 질 좋은 용기(容器)들이 만들어지기 시작했고 현대식 가마가 등장하면서 자기류 제품들이 우후죽순처럼 쏟아져 나오면서 토기에 대한 관심이 급속히 식어버렸기 때문이다. 여기에 토기제작에 뛰어드는 후배들이 모두 떠나버린 것도 토기가 쇠락한 결정적인 이유였다. 토기에 관심을 가지고 배명장 밑에서 열심히 배운 제자들이 100여 명에 이르지만 정작 다 배우고 나면 다른 곳으로 나가 토기가 아닌 자기로 입신하고자 애 쓸 뿐이었다.

“그게···, 자기가 토기보다 훨씬 쉽기 때문입니다. 자기는 물레에 얹어서 돌기기만 하면 되잖아요. 불도 전기 가마에 가스 가마에···, 더구나 토기는 자기류와 달리 가마에 불 때고 나면 쓸 만한 작품이 20%도 안 됩니다. 그러니 누가 이 어렵고 힘든 토기를 만든다고 하겠습니까?”


그나마 다행인 것은 토기에 대한 중요성을 안 각종 언론·방송 매체들이 배용석 명장을 조명하며 각종 다큐멘터리나 기획물에 출연하여 토기제작과정을 밝혀 놓았다는 것. 1천 년 넘게 역사의 뒤안길에 사라져 있던 토기를 어렵게 재현해냈는데 또 다시 문명의 그늘 뒤로 숨어버릴 지도 토기에 대한 배용석 명인의 마음은 허허롭기만 하다. 다만 토기의 효용성이 과학적이고 현대적으로 다시 검증되어 자신에게 배운 제자들이 다시 토기로 돌아오거나 새롭게 토기를 배울 사람이 나선다면 자신의 진전을 언제라도 내주겠다며 실낱같은 희망을 붙든다.

“지난 번 TV쇼 진품 명품에 가야 토기가 나왔는데 그 제작기법을 전문가란 분들이 전혀 엉뚱하게 설명하더라고요. 직접 만들어보지 않아서 그럴 겁니다”

코로나 19가 좀 진정되면 당장 그 가야토기부터 보러가야겠다며 아직도 토기에 대한 열정이 건재함을 은연중 드러낸다. 배용석 장인 근처에 평생 그와 함께 해온 물레와 작업도구들이 작업을 멈춘 채 수면 중이었다. 그 도구들이 다시 힘차게 제 역할 할 전성시대가 다시 올 수 있을까? 배용석 명장이 제자들에 둘러싸여 기분 좋게 불 때는 모습을 다시 보고 싶다.
X
URL을 길게 누르면 복사할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