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병길 신라문화원장-서악마을, 나 홀로 국가혁신박람회 가다

대부분 정부기관, 광역지자체, 공기업 단위 마을로는 유일한 참여
민·관·기업 공동참여 마을 가꾸기의 대표적 사례!

박근영 기자 / 2019년 11월 28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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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진병길 신라문화원 원장.

‘첨성대를 파내서 멀리 보내버리거나 무너뜨려버리고 싶다’
‘경주 살면서 유적지 때문에 집도 잃고 논밭도 잃고 이웃도 잃었다’
듣기만 해도 끔찍하기 이를 데 없는 이런 말은 70~80년대 이후 문화재로 인해 피해를 입은 경주시민들의 입에서 자연스럽게 흘러나오던 원성이었다. 문화재를 조상이 물려준 자랑스러운 혜택으로 생각하기보다는 문화재로 인해 피해 입은 상흔들이 더 깊어서였다. 황남동, 인교동, 황오동, 사정동··· 과거 인구가 밀집했던 이들 동네들은 문화재 보호와 사적지 발굴, 공원화 등의 정책 아래 대부분 헐리고 뜯겨 무인지경이 되었고 그 속에 살던 주민들은 뿔뿔이 흩어져 소식조차 끊어져버렸다. 사람, 그 중에서도 주민이 중심이어야 하는 마을은 덩그러니 유적만 남은 채 주말 관광객들로 인해 교통체증 유발요인이 되어갔다.

서악마을도 자칫 이런 위기를 맞았을 수도 있을 것이다. 태종무열왕릉을 비롯한 김인문, 김양 묘 및 서악동 고분군과 바로 근처 선도산에 흩어져 있는 삼층석탑과 전 진흥왕릉 진지왕릉 등 고분들, 서악서원과 도당서당 등 어느 개발위주 정책입안자가 황남동 등에 들이댄 잣대로 주민들을 몰아내고 공원화 시키려고 했다면 별 수 없이 공동화의 길을 걸었을 만큼 서악마을은 만만찮은 유적군이 존재하는 곳이다.

그러나 서악마을은 이런 위기에서 벗어나 있음은 물론 토착 주민들과 광역지자체, 문화재청 ‘KT&G’가 공동으로 참여해 이전과 완전히 다른 상생 마을로 탈바꿈하였을 뿐만 아니라 혁신의 아이콘으로 당당히 자리 잡았다.

지난 11월 22일부터 24일까지 동대문 디자인 플라자(DDP)에서 제1회 정부혁신박람회가 열렸다. 이 박람회는 정부 각 부서들과 광역지자체. 정부관련 공기업 등이 참여한 데 비해 서악마을이 독야청청 마을단위로 참가해 화제를 모았다. 그 중심에 진병길 신라문화원 원장과 신라문화원 예하의 문화재 돌봄 사업단이 있다.

“2010년부터 주민들과 함께 서악마을 가꾸기를 시작했습니다. 처음 서악서원 고택숙박체험을 시작으로 서악마을 정비작업을 시작했는데 주민들의 참여와 경북도 문화재청의 지원이 이어지며 사업이 본격화 되었고 특히 KT&G가 적극 후원하면서 지금의 모습으로 진화할 수 있었습니다”

진병길 원장에 따르면 서악마을 사업이야말로 문화재를 주민 친화적으로 바꾸는데 민·관·기업이 혼연일체 된 가장 모범적인 사례다.

서악마을은 전체적으로 200여 가구 600여 주민이 살고 있는 작은 동네로 이 중에서 직접적으로 문화재 돌봄 사업단과 관련 맺은 것이 70여 가구 150 여 명의 주민이다. 이 지역 주민들은 마을을 아름답게 가꾸기 위해 기와와 집수리 등 자기부담이 50% 들어가는 부담 큰 공사에 기꺼이 참여했다. 문화재 돌봄 사업단이 담장 낮추기, 마을길 미화작업 등에 마음 편히 전념할 수 있었던 것이 이런 주민들의 호응 덕분이었다고. 여기에 경북도와 문화재청의 지원으로 근처 유적지들이 일제히 정비된 것도 서악마을 정비에 기폭제가 되었다.

↑↑ 진병길 원장이 문화체육관광부 김용삼 차관과 문화재청 정재숙 청장에게 서악마을 혁신사례를 설명하고 있다.

-사계절 꽃잔치. 구절초 음악회와 사례지 밴치마킹으로 방문객 늘어, 휴식과 힐링의 마을 만들고파

2017년부터는 본격적으로 꽃단장이 시작되었다. 진병길 원장은 처음 서악마을에 국화를 심었다가 우연한 기회에 구절초가 마을에 더 잘 어울린다는 생각에서 변산반도로 유명한 전라북도 부안에서 구절초 3만 포기를 구입해 마을을 꾸몄고 이어 무안에서 연꽃을 들여와 보희연못(샛골 연못)에 심었다.

또 정읍에서는 꽃무릇을 구입해 동네 곳곳에 배치했다. 진달래와 철쭉, 작약과 코스모스도 전략적으로 심었다. 이로 인해 서악마을은 3월 진달래, 4월 철쭉, 5월 작약, 6월과 9월 코스모스, 7~8월 연꽃, 9월 꽃무릇, 10~11월 구절초 등 사시사철 꽃이 피는 꽃순환을 이루었다. 부처님 오시는 날 전후 해서 폐사지와 마을에 다는 등과 주민음악회와 어울린 꽃밭도 인상적이다.

마을이 반듯해지고 골목들이 친근해지면서 마을 자체에 대한 주민들의 애정도 깊어갔다고. 여기서 진병길 원장의 회고담 하나.

“강모 사장이란 분이 서악마을로 이사오면서 2층까지 건축허가 난 집을 사 오셨어요. 강사장님과 그 분 가족들이 마을을 보고 너무 예쁘고 여유롭다 좋아하시며 2층 집 세울 기대에 부풀었지요. 그때 제가 ‘이 마을 주민들이 강사장님 맞이하려고 7년 동안 가꾸어 왔습니다. 그런데 뜬금없이 2층집이 세워지면 이웃집이나 마을 주민들이 서운하지 않을까요?’ 하며 1층으로 낮춰 지을 것을 권했습니다. 강사자님이 흔연히 생각을 바꾸어 1층으로 설계를 바꾸셨지요”

이처럼 마을의 변화가 생각의 변화로 이어질 만큼 서악마을은 주민들의 공감대를 얻고 있다는 것이다.

이런 서악마을의 변화에 결정적인 도움을 준 것이 KT&G다. 2017년 1억 5,500만원, 2018년 1억3800만원을 지원한 KT&G의 지원 덕분에 이 같은 사업이 순풍을 탈 수 있었던 것. 진병길 원장은 이 비용 중 1억 가량은 문화재를 정비하는데 사용하고 나머지는 마을 가꾸기에 사용했다고 소개하며 기업이 지방문화와 지역 발전을 위해 후원한 사례로서도 주목할 만한 일이라 평가했다.

이 같은 변화는 자연스러운 방문객 증가로 이어졌다. 특히 신라문화원이 2017년부터 야심차게 구절초 음악회는 2018년 1만5천 여 명의 관중이 모였고 올해는 3만 명 넘는 관중으로 훌쩍 늘었다. 처음 서악서원 고택체엄으로 시작한 숙박사업이 지금은 마을 내에 10개 소의 한옥 게스트 하우스가 성행하며 주말에는 만실을 기록할 만큼 인기를 끌고 있다. 특히 방문객 중에는 서악마을의 성공사례를 밴치 마킹하기 위해 다른 지자체나 마을의 방문도 끊이지 않고 있다고.

그러나 한편으로는 지나친 관광객 증가로 인해 마을이 자칫 소란스럽게 되거나 환경오염문제를 일으킬 수도 있어 이에 대한 대비책도 하나씩 세우는 중이다. 대표적으로 ‘걷는 마을’을 표방하며 자동차는 무열왕릉이나 김인문묘에 마련된 주차장에 세우고 몸만 마을을 둘러보도록 홍보하는 것. 서악마을 전체를 도보로 구경하려면 사람들 성향에 따라 1~2시간쯤 걸리는데 마을 성격을 천천히 걸으면서 느끼는 곳으로 인식시켜 나간다고.

“서악마을은 황리단과 다른 매력이 있는 곳입니다. 황리단이 상업적인 곳이라면 서악마을은 휴식과 힐링을 위한 마을입니다. 많은 관광객보다 주민들과 어울리며 삶의 여유를 느끼고자 하는 분들의 안식처로 발전시키는 것이 주민들과 저희 사업단의 목표입니다”

오랜 기간 경주의 멋을 가꾸고 지켜온 신라문화원 진병길 원장의 말에는 주민들을 위한 진심이 어려있다. 서악마을에는 젠트리피케이션도 투어리스티피케이션도 없는 오직 주민이 우선되는 마을이기를 기대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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