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경 이기고 꿈 이룬 소프라노 이민정 씨!-“경주에도 좋은 사람 있어야 되잖아요?”

서울대 음대부터 수석 졸업 제조기
소프라노 임선혜 씨 등 도움 받으며 독일 유학 견뎌내!

박근영 기자 / 2019년 10월 31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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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민정 씨

“경주에도 좋은 사람 있어야 되잖아요?”
뛰어난 이력에 출중한 실력을 갖추었으니 서울이나 더 넓은 도시에서 서로 부를 법한데 왜 경주에서 활동하느냐는 물음에 사이다 같은 대답이 돌아왔다. 당찬 의지로 성악, 특히 우리나라 오페라계가 주목할 만한 성취를 이룬 후 바로 고향에 돌아와 쭉 경주를 중심으로 활동하는 소프라노 이민정씨! 평범했던 어린 소녀가 경주의 프리마돈나로 거듭나는 데는 그녀의 소질을 알아보고 적극적으로 음악의 길을 가게 한 적지 않은 ‘은혜’들이 있었다. 용강초등학교 때 음악선생이셨던 조은주 선생, 자신을 스카우트하고 지원을 아끼지 않았던 포항예술고 조미련 선생과 김현호 교장이 청소년기 이전 이민정 씨의 든든한 후원자들이었다.

고교시절 각종 대회에서 성가를 날린 덕분에 서울대 음대 성악과에 수석으로 입학한 이후 서울대에서 적극적으로 이민정 씨를 지도하고 조언한 분들이 소프라노 박노경 교수와 메조소프라노 윤현주 교수 등 실력가들.
그러나 서울대 음대에 입학 이후 이민정 씨는 무대활동보다 음악선생이 되는 것을 목표로 정하고 있었다고. 이민정 씨는 음대 진학을 꿈꾸는 중고생들을 대상으로 레슨을 해주며 서울대 성악과를 수석으로 졸업했고 다시 서울대 음악대학원 성악과로 진학해 역시 수석으로 졸업했다.

대학원을 졸업한 이민정 씨는 더 이상 꿈꿀 여력이 없었다고 회상한다. 클레식에 대한 소비가 지극히 제한적이고 유학을 다녀오지 않으면 아무리 실력이 좋아도 그것을 정당하게 인정하지 않는 국내 음악계의 그릇된 관습상 유학은 꼭 다녀와야 하는데 엄청난 유학비를 감당할 자신이 전혀 없었기 때문. 그것이 이민정 씨가 교직으로 꿈을 바꾼 현실적인 이유였던 것. 실제로 이민정 씨는 대학원 졸업 후 용인에 있는 신촌중에서 기간제 교사로 근무하며 성악계와 멀어지는 듯 싶었다.

바로 이 무렵 한국예술종합학교 배민수 교수가 이민정 씨의 실력을 알아보고 반주과 학생들의 크고 작은 연주회에 초대해 노래를 부르게 해주는 한편 유학을 권유하며 이렇게 말했다.

“생각해 봐, 학부나 대학원 다닐 때 너보다 노래 못하던 사람들이 유학 갔다 왔다고 무대에 섰을 때 네가 진심으로 박수칠 수 있겠어?”

서늘하게 들렸던 그 물음에 ‘아무래도 흔쾌히 박수칠 수 없을 것’이라 판단한 이민정 씨는 결국 자신을 다독이고 유학길로 나서게 됐다고 고백한다. 마침 서울 오페라단에서 기간제 교사를 하면서 받은 급여와 연주비 등으로 2000만원을 모은 후 독일 유학길을 찾기 시작했다고.

그러나 현실의 벽은 생각보다 높아 이 정도 비용으로 유학하기에는 턱없이 부족했다. 꿈을 꾸지 않았으면 모를까 한 번 꾼 꿈은 더 크게 가슴을 두드리는 반면 현실은 팍팍하기만 해서 답답할 때 또 다시 구원의 손길이 왔다. 박노경 교수가 이미 독일에 거주하며 활발히 연주활동을 펴고 있는 소프라노 임선혜 씨를 소개해 준 것.

“선혜 언니는 서울대 선배신데 이미 그 무렵 독일에서도 명성을 얻은 대단한 분이셨지요. 교수님이 평소 제 목소리가 선혜 언니를 닮았다고 하시며 저도 선혜 언니처럼 되기 바라셨고 그게 바로 제 꿈이기도 했지요.”

임선혜 씨는 거처로 고민하는 이민정 씨에게 기꺼이 베를린 자기 집에 머물 수 있도록 허락해주었고 독일 생활 동안 온갖 도움을 아낌없이 주었다고.

독일에서 어학공부하며 1년간 준비해 베를린에서 떨어진 국립 하노버 음악대학 오페라과 석사과정에 합격한 이민정 씨는 다시 숙소 문제로 고민하던 중 이번에는 뜻밖에 친구 언니인 ‘소라언니’의 도움으로 딱 하나 남은 기숙사 방을 배정 받을 수 있었다고.

하노버 음악대학에 다니면서도 이민정 씨는 공부시간 이외에는 대부분 근처 한국인 식당에서 아르바이트하거나 독일의 음악대학에 들어가려는 한국인 학생들을 레슨해주며 학비와 생활비를 벌었다. 이런 악바리 근성 끝에 역시 석사과정을 수석으로 졸업했지만 이 기간 동안 콩쿨 참가는 엄두조차 낼 수 없었던 것이 가장 큰 아쉬움! 콩쿨에 참여하려면 참가신청비와 대회기간 체류비 등 막대한 비용이 드는데 이것을 감당할 수 없었던 것.

-자동차로 병원 실어준 은인 찾고파 “저를 있게 한 많은 은혜들, 경주와 후배들 위해 베풀겠습니다”
이민정 씨는 독일에서 가장 비통한 순간을 졸업 시기 본격적으로 무대에 서기 위해 극장장들과 오디션 볼 때로 기억한다. 자신의 노래와 연기가 다 좋지만 얼굴의 큰 흉터로 인해 캐스팅할 수 없다며 현실적으로 말해 준 것. 여기서 이민정 씨는 생애 최악의 순간인 6살 때로 돌아가지 않을 수 없었고 반대로 여기서 최초의 구원자를 만나게 된다. 아버지 친구분들과 피서 갔다가 오는 길, 음주운전했던 운전자의 부주의로 인해 차가 자갈더미로 밀리면서 전복, 어린 이민정 씨가 사람들에게 깔려 얼굴이 형체를 알아볼 수 없을 만큼 크게 다친 것.

“병원으로 저를 옮겨야 했는데 아무도 도와주지 않았나 봐요. 그때 아주 깨끗한 새 차에, 피로 시트를 다 적시면서 저를 병원으로 옮겨준 분이 계셨어요. 총망중에 아버지께서 그 분 연락처 받아놓은 것을 잃어 버리셨어요”

아프고 충격적이었을 그 끔찍한 기억과 그 후로 무려 10번 넘는 성형수술의 악몽보다 그때 자신을 실어준 차주에게 고마움 표시 못한 것이 더 급한 숙제인 이민정 씨···, 이번 인터뷰 기회에 꼭 그 은인을 찾고 싶다고 기대한다.

오디션 낙방 충격과 박사과정을 향한 갈등, 무대로의 꿈과 그것을 위한 또 한 번의 성형수술, 그 와중에 졸업연주 준비와 힘겨운 생활고를 해결하기 위한 아르바이트까지···, 지독한 내홍에 시달리던 이민정 씨는 어느 날 문득 탈진해 쓰러진다. 이때 다시 자신을 돌봐 준 임선혜 씨가 ‘오로지 자신만 생각하라’며 조언, 결국 졸업과 동시에 귀국길에 오른다.

“마침 그 무렵 남동생이 사고로 다쳤는데 가족들이 제가 염려할까봐 그걸 알리지 않았어요. 제가 아무리 노래를 잘 하면 뭐합니까? 제일 소중한 사람들이 어떻게 되는지도 모르는데요···”

이민정 씨가 굳이 경주로 돌아온 첫 번째 이유는 가족들을 향한 그리움이었다.

“무대에 올라 박수 받고 환호 듣고 나면 단지 그때뿐이었어요. 그 시간 이후 아무도 저를 거들떠보지 않았어요. ‘내 사람 없는 무대’와 그것이 주는 공허···, 그 무의미함이 싫었어요”

이민정 씨의 경주행 두 번째 이유다.

“지금은 무대에 서는 재미가 얼마나 큰지 모릅니다. 공연이 끝나도 많은 분들이 다음에 만나서 혹은 전화로 칭찬해 주시지요. 무대에 서는 맛을 넘어 삶이 풍요로워졌어요”

이런 소박함이 이민정 씨의 발목을 경주에 잡아 놓은 것은 거꾸로 경주의 다행이기도 하다.

“그러나 무대에 설 기회가 너무 적은 것이 아쉽습니다. 그러다보니 좋은 실력가들이 서울이나 다른 큰 도시로 떠나버립니다”

이민정 씨가 주연을 맡은 경주 창작 오페라 ‘마담수로’에도 자신을 제외한 주연들이 대부분 다른 지역에서 오신 분들이었다는 것. 출신 지역의 문제가 아닌, 한 번 온 음악가들을 오래 붙잡아 두지 못하는 사정이 딱하다는 것이다.

“오페라 자체도 과감히 달라져야 자생력을 키울 수 있습니다. 관습적으로 내려오는 어려움과 딱딱함을 과감히 벗어 던지고 관객과 호응하는 재미있는 변화를 찾아야 합니다”

이민정 씨는 오는 11월 19일로 확정된 본지 창간30주년 기념 공연에서 가장 먼저 초대가수로 이름 올린 연주자다. 경주에서 다시 경주로, 오늘의 이민정 씨가 있기까지 많은 따듯한 이들의 은혜가 이어졌다면 귀향후 그가 내밀 음악의 은혜는 경주를 감동스럽게 울릴 것이고 새로운 제2의 이민정을 위한 또 다른 길이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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