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치열했던 40여일의 어래산 공방전 ‘안강·기계 전투’

어래산의 주인 17차례나 바뀌어 참전자들 잊지말고 처우개선 돼야

엄태권 기자 / 2019년 06월 20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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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좌측부터 김동경, 정병채, 임광혁 참전자.

본지는 호국보훈의 달 6월을 맞아 경주에 생존해 있는 6.25 참전용사를 만나 비참했던 그날의 기억을 들어봤다.

1950년 6월 25일. 6.25 전쟁이 시작된 지 3일 만에 서울이 함락되고 국군은 패퇴를 거듭하며 국제연합군(UN)과 함께 8월 초 낙동강을 따라 최후 방어선을 구축하기에 이른다. 이렇게 구축된 ‘낙동강 방어선’의 동부전선에서 가장 치열했던 ‘안강·기계지구 전투’는 40여일동안 안강에 자리 잡은 어래산(572m)의 주인이 17차례나 바뀌었다.

-잊혀져버린 소대원 가슴에 묻은 임광혁 씨
임광혁(91) 씨는 6.25 개전 전부터 국방경비대의 특무상사로 개성지구에서 복무를 하고 있었다. 6월 25일 소련제 전차를 비롯한 막강한 화력과 병력으로 물밀듯이 밀려오는 북한 인민군에 의해 임 씨의 부대는 의성까지 후퇴하게 됐다.

“수도사단 17연대에 편성됐는데 우리 소대에서 제가 특무상사로 계급이 제일 높았어요. 어느 날 밤에 의성의 한 산골마을 교실이 두 칸 있는 학교에서 인민군과 육박전을 벌였습니다. 그 당시 전기가 어딨습니까? 깜깜해서 피아 구분도 힘들었죠. 다만 인민군은 머리가 짧았고 아군은 이등병도 머리가 제법 길어서 피아식별을 머리카락 길이로 했었어요. 머리카락을 잡아서 짧으면 총을 쏴버렸던 거죠”

임광혁 씨는 그때의 처절했던 육박전에 대해 회상했다. 날이 밝아 확인한 결과 인민군 13명을 사살했고 아군은 1명이 전사한 상황. 하지만 이들의 의성 전투의 공은 임광혁 씨의 성토에도 그의 소대가 아닌 다른 부대가 차지해 훈장과 포상을 받았다고 전했다.

“내일을 알 수 없는 전란 중에 훈장과 포상에 대해서는 크게 생각 못했죠. 그래도 의성에서 인민군을 사살한 것은 우리 소대였다는 걸 알리고자 노력했지만 허사였어요. 정말 분한 일이죠”

그렇게 생사를 함께한 소대원들은 임 씨와 함께 안강·기계 전투에도 참전했다. 하지만 40여일의 치열했던 전투에서 소대원들은 모두 전사했다며 임광혁 씨는 눈시울을 붉혔다.

“강동면 인동리 전투에서 소대원들 이 전부 전사하고 소대장인 저 혼자 살아 남았죠. 게다가 나라를 위해 목숨바친 그들을 외면하는 지금의 나라가 너무 원망스럽습니다”

임광혁 옹은 이후 인천상륙작전의 성공으로 북진해 회산진 전투에도 참전했다.

-16세 경주중학교 학도병 정병채 씨
16세의 학도병으로 안강·기계 전투에 참전했던 정병채(86) 씨.

“경주중학교를 다니던 중 학도병으로 참전했지요. 그 당시 학도병들은 대구에서 한 달간 교육을 받고 대부분 이곳 안강·기계 전투에 투입됐어요. 그래도 어려서 그런지 뒤늦게 투입돼 20여일동안 펼쳐진 공방전에 참전했어요”

정병채 씨는 중학교 2년 선배를 안강·기계 전투 중 잃었다.

“저 앞에는 중학교 2년 선배가 중간에는 1년 선배, 저희 분대 막내였던 저는 뒤쪽에서 고지를 점령하기 위해 포복으로 올라가고 있었죠. 무덤 근처였는데 산에 나무가 거의 없다시피 했었죠. 멀리서 인민군이 폭격을 했는데 그 폭격으로 2년 선배가 그 자리에서 전사했었어요”

그는 선배에게 달려가서 불러봤지만 숨은 결국 넘어갔고 그때의 상황이 아직도 생생하게 떠오른다고 얘기했다. 이후 국군이 반격하며 북진하자 그냥 집으로 돌아갔다고 전했다.

“아무것도 없었어요. 어린 나이에 윗사람들이 사라지니 집으로 돌아갔어요. 슬퍼하고 어떻게 할 겨를도 정신도 없었죠”

-동부전선의 다양한 장면을 기억하는 김동경 씨
6.25참전유공자회 경주지회장을 역임한 김동경 씨는 당시 징용으로 안강·기계 전투를 경험했다. 그는 먹을 것과 탄환 등을 각 부대로 운반하다 보니 각각의 전투를 경험하게 됐다고 전했다.

무엇보다 안강·기계 전투에서 국군과 학도병들이 값진 희생을 치러 당시 경주는 인민군을 보기 힘들었고 적의 경주 진출을 20여일 동안이나 지연시키는 성과도 있었다고 말했다.

“안강·기계 전투에서 값진 피를 흘린 것이 낙동강 방어선의 총반격의 기반이 됐습니다. 그리고 당시 안강과 포항은 불바다가 됐고 천북까지 전선이 밀린 적도 있었지만 이들의 희생 덕분에 경주 시내에는 인민군 한 사람도 들어 올 수 없었죠”

징용으로 안강·기계 전투에 보급품을 전하던 김동경 씨는 1952년 9월 소집돼 제주도의 육군 제1훈련소에 입소했다고 한다. 거기서 교도연대 전술과 분대방어반 조교로 근무하고 그는 전쟁이 끝난 후 1954년 제대했다.

↑↑ 전적비에 기록된 전공기를 읽고 있는 이종달 씨.

-‘향토는 우리가 지키자’ 학도병 이종달 씨

안강읍 육통리 넓은 들판 한 구석에 의연히 서있는 전적비 하나가 있다. 6.25 당시 학도병으로 참전했던 이종달(87) 씨가 자신의 땅을 기부해 2000년 11월 3일 건립된 ‘6.25 기계·안강지구 학도의용군 전적비’다.

이종달 씨는 안강중학교 3학년 재학 중 어래산 너머로 인민군이 몰려들자 ‘향토는 우리가 지키자’며 머리에 흰띠를 두르고 경비를 섰다고 회상했다. 이후 대구와 경북 등지에서 자원한 148명의 학도의용군과 함께 안강제일초에서 군사훈련을 받고 9월 3일 안강·기계 전투에 투입됐다.

“군사훈련을 받았지만 10대의 어린 나이의 우리들은 총도 제대로 쏠지 몰랐어요. 또 소대장은 148명의 학도병을 어래산 능선 참호에 2인 1조로 배치했고 사격 명령이 없으면 절대 총을 쏘지 말라고 명령했죠. 밤이 돼 전투가 시작했지만 총을 쏘는 현역들과 달리 우리는 지휘관이 없어 멀뚱히 참호에 있었죠”

밤새 전투에 의해 고지는 인민군에 의해 점렸됐고 결국 총도 못 쏜 이종달 씨를 비롯한 16명의 학도병들은 인민군들의 포로가 돼 비학산으로 끌려갔다. 이후 이 씨는 우여곡절 끝에 인민군들에게서 탈출 했지만 국군에 잡혀 포로가 됐고 부산의 육군 본부에 가서야 포로생활을 끝맺을 수 있었다고.

“인천상륙작전이 성공해 국군이 북진했고 국제법상 만 18세 미만의 어린 사람들은 참전을 시킬 수 없어서 당시 이승만 대통령이 학도병들을 해산시켰어요. 저도 참전 증명서를 발급받아 집으로 돌아갔다”

이종달 씨는 어래산의 비참했던 전투를 학도의용군 전적비 비문에 남겼다. 그가 남긴 비문에는 당시의 급박하고 참혹했던 전황을 잘 나타내고 있다.

‘여기서 더 밀리면 부산까지 빼앗겨 한반도는 완전히 공산치하에 들어가게 되었다. 이때 우리 학도병은 자원참전하여 어래산을 경계로 사십여일간의 공방전이 벌어졌으며, 고지의 주인이 열일곱 차례나 바뀌었으니 당시의 전황은 더 이상의 설명이 필요치 않을 것이다. 기계천, 형산강물이 선혈로 물들었고 전우의 시체를 밟고 넘어야 했습니다’

↑↑ ‘6.25 기계·안강지구 학도의용군 전적비’. 비명은 6.25 50주년을 맞아 이한동 국무총리가 직접 썼다.

-6.25의 참혹했던 기억들 잊지 말아야

현재 경주지역에서 안강·기계 전투 참전용사 중 생존자는 김동경(86, 징용), 정병채(86, 학도병), 임광혁(91, 전투), 이봉훈(87, 전투), 정화택(88, 전투), 이상락(92, 징용), 이종달(87, 학도병), 김만조(91, 전투) 강대문(88, 징용), 서응수(91, 전투), 박명돌(87, 징용) 씨 등 11명이다.

이종달 씨는 최근에 다들 세상을 떠나거나 거동이 불편해 2~3명도 모이기 쉽지 않다고 안타까워했다. 생존한 6.25 참전용사들은 한 목소리로 말하고 있다. 당시의 참혹했던, 그리고 이름도 없이 조국을 위해 희생한 영웅들을 제도권에서의 올바른 교육을 통해 잊지 말고 지금의 대한민국을 잊게 한 참전 생존자들의 처우개선이 필요하다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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