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핏물의 낙동강 ‘다부동 전투’의 기억, 노병 손관호 옹

처절했던 전투, 사라져간 이름 모를 영웅들
조국위해 목숨 바친 젊은 넋들, 잊지말고 기억해야

엄태권 기자 / 2019년 06월 13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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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손관호 옹

본지는 호국보훈의 달 6월을 맞아 경주에 생존해 있는 6.25 참전용사를 만나 비참했던 그날의 기억을 들어봤다.

-다부동 전투
1950년 8월 1일부터 9월 24일까지 치열했던 ‘다부동 전투’. ‘다부동 전투’는 최후의 국군 방어선이었던 낙동강 방어선 전투 중 가장 치열했던 전투로 기록돼 있다.

“맑은 낙동강 물이 핏물로 변했었지. 낙동강 방어선을 사수하려는 국군과 강을 건너려는 수많은 북한 인민군의 피가 강을 이뤘어. 정말 치열했던 전투였어”

6.25발발한 1950년 북한 인민군의 막강한 화력과 준비된 전술에 의해 3일 만에 서울을 함락 당하고 국군은 대구, 부산, 울산, 경주, 마산 일대만 남겨둔 채 8월 1일, 최후의 방어선을 낙동강을 따라 구축하게 된다. 한반도를 최단 시간에 함락시키려는 인민군과 필사적으로 지키려는 국군과의 치열한 공방전이 낙동강을 사이에 두고 펼쳐진 것.

그 중 가장 치열했던 ‘다부동 전투’는 8월 2일부터 9월 4일까지 단 30여일 만에 낙동강을 피로 물들였다. ‘다부동 전투’에 참전했던 손관호(91) 옹은 “여기서 후퇴하면 갈 데가 없다. 현재 남은 지역은 대구, 경주, 울산, 부산뿐인데 어찌할까. 이대로 무너지면 안된다. 죽을힘을 다해 조국을 지키자”라는 생각으로 전투에 임했다고 회상했다.

당시 1사단 11연대 9중대 선임하사로 전투에 투입된 손 옹은 전우들과 함께 소금물로 뭉친 주먹밥으로 끼니를 때우며 전투를 치렀다.

↑↑ 단기 4282년(1949년) 대구부대 제2소대 기념사진.

 “전투는 밤에 이뤄졌지. 낮에는 미군의 폭격기로 인해 적군이 강을 건너지 못했거든. 그래서 저녁 6시에 일개 중대가 고지로 올라가면 소금물로 뭉친 주먹밥을 한 사람당 한 개씩 소대별로 배식을 했어. 우리는 그것을 먹으면서도 내일도 주먹밥을 먹을 수 있을까 서로 눈치만 살펴었지”

그렇게 치열했던 전투는 1950년 9월 15일 맥아더 장군이 이끄는 UN군과 국군의 인천상륙작전을 계기로 방어전에서 반격으로 전환됐다. 손관호 옹도 1사단 부대원으로 잠도 자지 못하고 서울을 지나 운산까지 진격했다. 하지만 전쟁은 쉽게 끝나지 않았다.

그는 “내일이면 전쟁이 끝나 두만강 물에 피 묻은 칼을 씻는다고 했지만 중공군이 인해전술로 투입되며 눈물을 흘리며 후퇴하게 됐지”라며 두만강을 넘지 못함을 안타까워했다.

이후 중공군의 남하로 지친 몸을 이끌고 죽을힘을 다해 후퇴했고 지루한 공방전 끝에 휴전이 찾아왔다.
 
↑↑ 단기 4281년(1948년) 4월 7일 국방경비대 입대 기념사진.

-일제 강제징용과 국방경비대

1929년 6월 12일 경주시 강동면 인동리에서 태어난 손관호 옹은 힘든 어린 시절을 보냈다.  그는 일제 강점기 강서보통소학교에서 목총 훈련, 신사참배 강요 등을 겪었다. 그러던 중 손 옹의 부친이 일본으로부터 비행장 징용통지서를 받게 됐다. 당시 그의 부친은 몸이 좋지 않아 결국 어린나이의 손관호 옹이 강제징용에 응하게 됐다.

그는 “경주서 80명이 트럭 3대에 나눠 타도 도착한 포항 오천 비행장에서 점심 저녁 겸 옥수수 1개와 납작 보리쌀 2~3개 붙은 밥에 소금국을 먹으며 8개월을 보냈다”고 회상했다.

해방 후 손관호 옹은 어려웠던 형편에 국방경비대에 자원입대해 터널과 철교 경비를 위한 경주 파견대에서 근무를 했다. 1948년 11월에는 여수에서 국방경비대 14연대의 반란으로 진압작전에 참가하게 됐고 1949년 1월 서울 영등포 포병학교에 입교해 개성 대구부대에서 근무를 하다 이듬해 6.25가 발발해 참전했다.

손 옹은 6.25 발발 초기를 회상하며 ‘육탄십용사’를 절대 잊을 수 없다고 말했다. “6.25가 터지고 열명의 용사가 조국을 수호하고 불꽃같이 사라졌지. 서부덕 상사 외 9명이 수류탄만 들고 적군 진지에 들어가 일개 분대를 전멸시켰던 거야. 물론 그들은 그 자리에서 모두 전사했고...”

결국 그들의 희생에도 불구하고 사전에 준비된, 그리고 막강한 화력의 인민군 때문에 손관호 옹의 부대는 후퇴에 후퇴를 거듭했다. 그러던 중 박격포 피탄에 부상을 입어 서울 세브란스 병원, 수원도립병원, 전남여수병원을 거쳐 마산병원에 입원하게 됐다고. 이후 손 옹은 낙동강 ‘다부동 전투’에 참전하게 됐다.

↑↑ 1954년 전우 송별 기념사진.

-그 때 이름 모를 영웅들을 기억해야

“6.25 종전 후 경주에서 다부동 전투 생존자들은 40여명이 넘었었어. 그래서 다부동 전투 기념식에 버스와 봉고차를 빌려서 갈 정도였지. 지금은 나까지 4명 남아있어”

세월이 흘러 당시 손관호 옹과 함께 전투를 치렀던 전우들은 하나 둘 세상을 뜨고 경주에 남은 다부동 전투 참전자는 손 옹을 포함한 4명이 전부.

“6.25도 잘 모르는 젊은 세대들은 ‘다부동 전투’는 당연히 모를 테지. 그날 이름도 없이 스러져간 젊은 영웅들을 누가 기억해 줄지. 당장 국가에서도 정치적 영향이 큰 사건들에 신경을 쓰고 이미 오래된 전쟁은 신경을 쓰지
않더라고”

손 옹은 6.25전쟁과 치열했던 그날의 전투가 조금씩 잊혀져가고 관심에서 멀어지고 있음을 아쉬워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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