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중봉 향한 치열한 정진, 남령 최병익 선생

탁월한 서법, 미소달마, 최고의 소나무 그림…선비 정신 담은 전시회 기대

박근영 기자 / 2019년 04월 25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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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중봉의 경지가 유감없이 드러나는 남령의 소나무 그림.

사방이 산자락으로 막혀 온전한 분지를 이룬 현곡면 분지의 한가운데 지점, 필소헌(筆笑軒)이란 당호의 아담한 주택을 들어서니 밖에서 보기보다 훨씬 넓은 서실이 펼쳐지고 사방에 글씨와 그림이 걸려있다. 추사체의 묘리를 터득한 것으로 알려진 굳세고 튼튼해 보이는 글씨체와 엷은 바람에 흔들리는 절묘한 소나무 그림, 방글방글 웃는 달마도 등으로 유명한 서예가 남령(南嶺) 최병익 선생의 서실이다.
인터뷰 간 기자들을 맨 처음 이끈 곳은 신비감마저 도는 소나무 그림 앞.

↑↑ 붓 잡는 법을 설명하는 남령 최병익 선생. 이렇게 해야 글씨를 쉽고 바르게 쓸 수 있다고 주장한다.

“제가 서예만 했으면 굶어 죽었을 겁니다. 글씨를 배우는 사람도 적을뿐더러 글씨를 사는 사람들이 더 없기 때문이지요”

선생의 말이 전혀 농이 아니라 숙연해진다. 그런데 이어진 말에 선뜻 이해가 가지 않는다.

“동양은 선의 질인데 누가 양질의 선을 구사하느냐에 따라 그림을 평가하는 기준이 됩니다. 그건 자신이 있지요”

눈앞에 펼쳐진 소나무 그림이 부스스 몸을 떠는 것처럼 보인다.

“소나무를 멀리서 보면 잎사귀가 전혀 보이지 않고 전체가 보이지요. 그런데 대개의 소나무 그림은 틀에 박은 듯 삐쭉삐쭉한 침엽을 그립니다”

지나친 형식주의를 꼬집는 말이지만 아무래도 양질의 선이란 말에 밀려 선연히 이해하기 어렵다. 이어진 달마도에 대한 설명은 오히려 쉽고 편안하다.

“잡귀를 쫓는 것은 밝은 기운입니다. 그러면 무섭고 음침한 달마가 아니라 맑은 미소가 흐르는 달마가 맞지요!”

양명한 기운을 한껏 드러낸 선생의 미소달마도는 특허까지 내놓은 그림이다. 일반적으로 알려진 달마의 흉측한 용모에 대해 악귀와 탈바꿈한 설, 주화입마로 인한 외모 변화설 등 온갖 설이 있지만 득도한 달마라면 자신의 표정관리쯤은 자연스럽게 할 수 있었을 것이란 측면에서 선생의 미소달마가 훨씬 설득력 있게 받아들여진다.

↑↑ 남령의 소나무 그림.

이어 다실에서 본격적인 대담. 그간 선생의 전시회를 자주 취재하고 인터뷰도 했지만 취재 중의 부산함으로 인해 물어보지 못한 것이 있었다. 바로 글씨와 그림을 대하는 기본적인 마음가짐이다. 선문답 같은 질문에 선생의 도도한 강론이 폭포처럼 쏟아진다.

“많은 서예 이론가들이 글씨를 잘 쓴다 못 쓴다 할 때 형상만 가지고 이야기합니다. 그러나 나는 글씨를 쓰는 본질을 중시합니다”

숨을 한 번 쉰 선생은 법주사에서 2년 동안 수련하면서 느낀 기이한 체험을 공개했다. 어느 새벽 예불 중 한 번은 붓이 둥그렇게 떠오르며 환희심이 극도에 달했다고. 그때부터 일어난 새로운 화두.

‘원은 어디인가? 붓은 왜 둥근가?’

붓이 둥근 것은 모든 면을 다 쓰라고 둥글게 만들어진 것이라 믿은 선생은 그날 이후로 글씨를 쓸 때 모든 방향으로 쓰는 것을 혼신을 다해 연습했다고. 선생의 당호 필소헌은 바로 여기에서 나왔다. 선생이 쓰는 붓은 모든 털이 다 제 역할을 하기 때문에 ‘붓이 행복해서 웃는다’는 뜻이다.

“붓의 터럭 하나하나가 다 생명감이 있습니다. 단순한 검정색 선들이 사람에게 감동을 주려면 붓털 하나하나가 다 자기 역할을 해야 합니다. 이게 바로 중봉(中鋒)이지요”

선생은 “대부분은 책들은 중봉이란 개념을 뾰족한 붓 끝이 글씨의 가운데로 가는 것을 중봉으로 설명하는데 나는 그렇게 받아들이지 않는다”며 “봉이 있는데 글씨 쓸 때 봉이 없어진다, 먹물 머금은 붓이 뾰족하지만 지면에 도달하면 퍼진다. 그렇게 퍼진 털이 하나하나 제 역할을 할 때 비로소 좋은 선이 그려지는데 바로 이 순간이 중봉이다”고 설명한다.

소나무에서 발현된 아스라한 선들이 바로 이 중봉의 결과라는 설명을 듣고 나서야 지금까지의 의문이 구름 걷히듯 환해진다.

“저는 평생 동안 이 중봉을 위해 수련해왔습니다. 그 수련의 자세가 선비들이 말하는 중용의 의미이고 그 중용을 추구하며 끓임 없이 노력하는 자가 선비겠지요”

장중한 설명을 들으면서 지금껏 선생의 그림과 글씨를 제대로 보지 못했다는 반성이 불현듯 일어났다. 선생의 구도(求道)와 같은 정진에 옷깃을 여미며 새롭게 글씨와 그림을 보는 눈이 떠진 듯 상쾌해진다.

5월 15일부터 21일까지 서울 인사동 소재 한국미술관 3층에서 선생의 개인전이 열린다. 선생 특유의 대형 소나무그림과 웅혼한 필체, 미소달마, 이 모든 중봉을 향한 선생의 부단한 노력을 새롭게 대할 수 있다는 마음에 마냥 설렌다.

“적어도 제 전시회는···, 지루하지는 않을 겁니다. 그것만으로도 다행스럽게 여기지요”
선생의 소탈한 웃음에 미소달마의 평온함이 묻어난다. 훌륭한 전시회가 기대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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