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1운동 100주년 특집(마지막)-백산무역(주)창립 100주년… 실질적 운영자 `최준`

지사들 방문 줄이어, 독립운동의 산실 경주최부자댁

박근영 기자 / 2019년 03월 21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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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최부자집 전경.

-복면강도 안희제 기록은 잘못 와전된 이야기, 박상진과의 일화···

“백산이 거액의 독립자금이 필요해 최준을 찾아가 부탁했으나 너무 큰돈이라며 난색을 표했다. 백산은 다른 곳으로 돈을 구하러 떠났다. 며칠 후 최준의 집에 강도가 들어 칼을 들고 돈 2만원을 내라고 위협했다. 최준은 강도가 내민 백지수표에 2만원을 적은 뒤 사인했다. 그러자 강도가 복면을 벗어던졌다. 놀랍게도 복면 안에서 안희제의 얼굴이 드러났다. 이튿날 최준은 2만원을 결재했다”

우리나라 독립운동사에 관심이 있는 사람이라면 이 이야기를 아는 사람이 더러 있을 것이다. 백산(白山) 안희제(安熙濟 1885~1943) 선생이 마지막 경주 최부자 문파(汶坡) 최준(崔浚 1984-1970) 선생에게 독립자금을 요구했다가 거절당하자 복면강도로 가장해 최준을 떠본 끝에 자금을 얻어냈다는 이야기다.  이 이야기는 안희제의 전기문에도 나와 있어서 많은 이들이 사실인 양 알고 있는 이야기다.


↑↑ 문파 최준(좌)과 백산 안희제<우>.

그러나 이 이야기는 와전된 이야기다. 왜냐하면 이 이야기는 최준과 독립운동가 광복회 총사령 박상진(1884~1921) 의사 사이에서 일어난 일이었기 때문이다. 두 사람은 사촌 처남매부지간으로 독립을 위해서라면 자신이 가진 모든 것을 다 내놓을 사람들이었고 그 이전에 서로의 진면목을 충분히 알고 의기투합한 사이다. 그러나 이런 이야기까지 나올 수 있었던 것은 안희제와 최준과의 관계가 그만큼 밀접했기 때문일 것이고 최준의 재력이 뒷받침됐다는 것을 의미한다.

3.1운동과 함께 초기 독립운동의 가장 중요한 자금줄 역할을 담당한 백산무역주식회사 창립 100주년이다. 백산무역의 양대 산맥 최준과 안희제!

최준이 안희제를 처음 만난 것은 손병희 선생과 교유하며 천도교를 지원할 무렵인 것으로 알려져 있다. 이 당시 최준은 박상진이 조직한 대한광복회 재정부장과 조선국권회복단 경주대표 역을 맡아 독립군의 자금줄 역할을 하고 있기도 했다. 그러나 소문난 재력가인 최준의 입장에서 지속적이고 과감하게 독립자금을 대기에는 너무 많은 어려움이 있었다. 큰돈을 마련하려면 땅이나 곡식을 팔아야 하는데 그러기에는 일제의 감시망이 너무 가깝기 때문이다. 바로 이런 고심을 할 무렵 안희제가 최준을 찾아 교촌으로 왔다.

안희제는 허위 선생과 허위 선생의 제자인 박상진 의사 등과 함께 만주에서 활동하며 ‘기미육영회’라는 학교를 세우고 ‘중외신문’이라는 신문사도 운영하는 등 적극적으로 독립운동을 해 오고 있었다.
부산에서 몇 백 석 중농의 아들로 자란 안희제는 최준을 만나기 전 이미 부산에 ‘백산상회’라는 무역회사를 차려 이곳을 통해 독립운동을 위한 자금을 보내고 있었다. 그러나 큰 부자가 아니라 언제나 자금에 시달리던 중 박상진을 통해 최준의 존재를 알게 된다.

안희제는 부산 구포에서 큰 부자로 이름 난 윤상은이란 사람과 함께 교촌으로 와 한 달 가깝게 최부자집에서 머물며 독립운동에 관한 세부적인 계획을 짠 것으로 알려졌다.

그것이 바로 백산무역주식회사를 설립해 해외에서 활동하는 독립단체를 돕는 일이었다. 그래서 내린 결론이 자신이 꾸려오던 백산상회를 백산무역주식회사로 만들고 한편으로는 실제 무역을 해 일경의 눈을 속이고 은행에 신뢰를 쌓아가고, 사업규모가 커지게 되면 무역을 빙자, 현지에 물품대금을 더 보내거나 해외에서 물건 값을 떼였다거나 장사를 잘못해 밑지게 됐다는 등의 핑계로 자금을 빼서 독립운동하는 단체에 지원하자는 것이었다.

-공식적인 주식 수는 위장, 백산무역주식회사의 실질적 견인차
백산무역주식회사가 설립될 당시 발행된 총 주식은 2만주였는데 공식적으로 알려진 것은 안희제가 2500주, 최준이 1800주를 보유하고 있었고 안익상이 850주, 정상환이 640주, 이우식(李祐植)이 600주, 이종화(李鍾和)가 560주, 허걸(許杰)이 550주, 정재완(鄭在涴) 500주, 윤현태가 400주를 가지고 있었다.

그러나 이는 숫자상의 분배일 뿐, 실제로 백산무역주식회사는 당시 회사규모로서는 국내 최고의 수준인 자본금 100만원으로 설립됐는데 그 중에서 최준이 처음 4분의 1 비용인 25만원을 먼저 내놓으면서 회사를 움직이기 시작하는 장본인이 됐다. 이들과 함께 백산무역주식회사에는 모두 182명의 주주들이 참여했는데 그 중에는 독립운동을 하려는 사람보다 실제로 경주최부자가 주도하는 회사에 투자해 돈을 벌려는 사람이 대부분이었다.

독립운동을 하기 위해서 그만큼 철저하게 회사를 위장한 것이다. 주식 보유량도 위장술이다. 최준이 주식을 적게 보유했으면서도 백산무역의 대표 취체 및 지배인역을 한 것만 봐도 이 회사의 중심이란 것을 알 수 있다. 주식을 적게 기록한 것 역시 최준이 백산무역에 전력을 다할 경우 일본경찰의 경계심이 커지게 될 것이기에 일부러 안희제보다 주식을 작게 보유한 것으로 위장한 것이다.

부산에 본사를 두고 대구와 원주에 지사를 둔 이 회사는 우리나라 특산품, 명주, 면포, 강포(마직물), 인삼 등을 해외로 수출하는 것을 명분으로 세워졌다. 그리고 초기에는 실제로 부지런히 사업을 전개해 일본경찰의 눈을 속였다. 사업을 제대로 해야 은행대출도 순조롭게 받을 수 있었고 그래야 일제의 의심으로부터도 자유로울 수 있었기 때문이다. 회사를 최대한 키워놓고 그 자금을 해외독립운동단체에 넘긴다는 야심찬 계획이었던 것이다.

처음부터 수익을 남기기보다 해외 독립지사들에게 자금을 보내는데 목적이 있었던 이 회사는 사업이 궤도에 올라 일본의 감시망이 느슨해지면서 물품 대금을 떼이거나 수출품이 비적들에게 약탈당했다거나 거래에서 손해를 봤다는 등의 이유로 자본금이 잠식되기 시작했다. 이렇게 자본금이 잠식되자 식산은행에서 대출을 받고 다시 그 대출마저 탕진하게 돼 급기야 1925년 회사경영부실로 은행으로부터 피소 당하기에 이른다. 이렇게 해서 자본금 100만원은 물론 은행에서 대출받은 돈까지 전부가 독립운동단체에 넘어갔고 경영부실로 인해 최준은 회사에서 쫓겨나게 된다. 최준은 이 일로 백산무역에서 완전히 물러나지만 안희제는 다시 회사에 복귀해 해외로 출장을 다니며 독립운동을 이어갔다.

백산무역주식회가 완전히 부도 난 것은 1928년. 그러나 주식회사인 백산무역의 파산은 곧바로 최준의 개인재산에 대한 조선식산은행의 압류로 이어졌다.

주식회사의 부도에 개인재산이 압류 당한 게 이해되지 않겠지만 그렇게 된 이유는 식산은행이 백산무역에 대출을 해줄 당시 기체결의서에 최준이 ‘개인입보’를 섰기 때문이다.

당시 돈을 대출 받은 곳이 주거래 은행인 조선식산은행이었고 부거래 은행이 경남합동은행이었다.
조선식산은행은 대출금을 회수하지 못할 것을 염려해 1925년부터 새로운 대출건이 생길 때마다 최준에게 개인보증을 하라고 압박했다. 어차피 독립자금을 대는데 목적이 있었던 최준은 기꺼이 개인보증을 수락했고 이로써 식산은행에서 대출된 자금 역시 고스란히 독립운동 단체로 넘어갈 수 있었던 것이다.

당시 최준이 개인보증으로 갚아야 할 돈의 총액은 130만엔, 쌀로 무려 3만석에 해당하는 거금이었다. 3만석이면 단순히 지금의 가치로만 쳐도 100억원 가까운 거금이다.

한편 최준이 국내에서 백산무역회사의 실질적인 운영을 했다면 안희제는 일경과 마적단이 횡행하는 국경을 넘나들며 스스로 독립자금을 해외로 전달하는 운반책의 역할을 해내고 있었던 것.

안희제는 일본경찰의 의심을 피하기 위해 일본 여자들과 어울리며 장사를 했다. 일본의 눈을 속이기 위해서는 방탕한 모습도 보여주고 사업가로 위장하기 위해서는 씀씀이도 큰 것처럼 위장하거나 어떤 때는 피눈물도 없는 장사치로 보여야 하기도 했다.

그러나 독립운동가로서의 안희제는 고결한 양심의 소유자임이 증명된다. 해방 후 김구 선생이 최준을 만나 안희제가 전해 준 독립자금 명부를 보여주었는데 최준이 보낸 자금과 일치해 최준을 감동하게 했다는 일화가 전한다. 최준은 당시의 어려운 여건 상 반쯤의 자금만 전해져도 성공적이라 당연하게 여겼는데 예상을 뛰어넘어 거의 대부분 전달됐던 것이다. 최준이 남쪽 안희제의 묘소가 있는 남쪽을 향해 곡하며 잘못을 빌었다고 전한다.

-사형제 중 세 명이 독립운동, 독립운동에 얽힌 역사적 인물들도 경주최부자댁 들러··· 독립운동의 또 다른 산실!!
한편 최준의 형제들 역시 독립운동에 깊이 간여하고 있었다. 대표적으로 셋째 동생 최완 선생이 상해임시정부 재정부장(현대의 재무관련 장관)으로 활동하다 일경에 의해 체포돼 순국했다. 당시 경주경찰서에서 최완을 유인하기 위해 일경이 최준의 필적을 위조해 어머니가 편찮다는 핑계로 최완을 국내에 불러들여 잡아갔을 만큼 중요한 인물이었다. 넷째 최순 선생은 백산무역 자금을 맡아 운영하는 상무이사 역할을 수행하며 자금 마련에 골몰했다.

안타깝게도 그는 해방 후 친일경찰 출신 서영출이란 자의 사주에 의해 피살된다. 그에 비해 둘째 동생 최윤은 중추원 참의를 맡음으로써 친일행각을 한 것으로 알려졌다. 그러나 최부자댁 종손인 최염 선생은 집안의 누군가가 친일행위를 함으로써 독립운동에 쏠리는 이목을 분산시킬 수 있었다고 회고하며 비록 중추원 참의를 지냈으나 내놓고 친일행위를 하지 않았다고 술회한다.

과객을 후히 대접하라는 최부자댁의 교훈처럼 마지막 경주최부자 최준 당대에는 구한말 이래 최준과 교유를 맺은 역사적 인물들도 즐비하다.

먼저 동학 2대 교주 해월 최시형 선생이 최준 선생의 유년기에 최부자댁에 장기간 은거해 있은 것으로 알려져 있다. 면암 최익현 선생은 최준이 19세 되던 해 경주최부자댁을 방문해 달포를 머물며 경주의 유생들과 교유를 나눈다. 당시 면암을 따라 온 인원이 200~300여명에 이른 것으로 알려졌다. 스웨덴의 구스타프 왕세자 부부도 최부자댁을 다녀갔다. 이들은 당시 발굴 중이던 신라고분에서 금관을 직접 꺼내기도 하는데 이 고분이 스웨덴의 한문식 가차이름인 서전의 ‘서’와 유물의 ‘봉’을 따 서봉총으로 불리기도 했다. 순종이 아들 의친왕 이강 공도 최부자댁에 머물며 최준에게 문파라는 호를 지어주었다. 손병희 선생, 인촌 김성수, 안희제 선생 등은 말할 필요도 없이 최부자댁을 자주 내왕했다.

경주최부자댁은 의병장 신돌석 장군도 최준, 최윤 형제와 함께 많은 일화를 남겼다. 지금의 교촌에 ‘요석궁’이라는 한정식 집 사랑채 대들보가 신돌석 장군이 혼자서 끌어올린 목재로 만들어졌다는 일화가 숨어 있다.

일제강점기 초기 독립운동 정신이 돋보였던 육당 최남선과 위당 정인보 선생 등이 경주최부자댁에서 지은 사마소 내 병촉헌에 머물며 경주역사서 ‘동경통지’를 편찬하기도 했다.

독립운동하다 망명했다가 해방 후 국방장관 등을 지낸 신성모 씨와 내무장관을 지낸 이효석 씨도 최부자댁 과객으로 오래 지냈다. 이 정도만으로도 독립운동사에서 경주최부자댁이 차지하는 비중은 막중하다. 3.1절 100주년과 동시에 백산무역주식회사 100주년 되는 2019년, 경주최부자댁과 문파선생의 삶을 회고해보는 것은 너무나 당연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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