재매정 2차 발굴, 고대 주택 구조파악 실마리 푼다

김유신 장군 옛집 복원위한 학술심포지엄 열려

이상욱 기자 / 2015년 04월 30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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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국통일의 위업을 이룬 김유신 장군 옛집 복원에까지는 상당한 시일이 걸릴 것으로 예상된다. 재매정 유적에서 발굴된 건축 유구 자체에 대한 조사와 분석이 현재 완료되지 않은 상태여서 유구에 대한 해석에 어려움이 따르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최근 실시한 2차 발굴조사에서 확인된 재매정택 유구 등을 통해 지금까지 알려지지 않은 한국의 토착적 건축문화에 관한 연구가 가능해질 것으로 보여 향후 성과가 주목된다.

이 같은 사실은 지난달 23일 경주시 주최, 신라문화유산연구원이 주관해 열린 ‘경주 재매정 활용방안을 위한 학술심포지엄’에서 발표됐다.

이날 심포지엄에서 관심을 모았던 것은 김유신 장군 옛집 복원 가능성 여부. 이정미 중부대 건축학교 교수는 ‘재매정 유적에 대한 건축사적 고찰’을 주제로 한 발표에서 “재매정택 중심건물은 현재까지 발굴된 신라왕경 주택유구의 흐름을 살펴볼 때 시기에 따라 필연적으로 건축구조의 변화가 수반됐을 것으로 판단된다”며 “중국 및 일본은 자국의 건축문화가 외래 건축문화를 수용해 새로운 건축형식을 만들어내는 연구가 진행돼 있으나, 고대 및 중세의 주택 유구가 전무한 한국에서는 아직 연구가 이뤄지지 못했다”고 밝혔다.

김유신 장군 옛집 복원을 위해서는 향후 재매정 유적에 대한 분석이 완료돼야 가능한 것으로 결론내린 것.

그러나 이 교수는 “재매정택은 지금까지 경주에서 발굴된 신라 왕경의 주택 가운데 거주자가 밝혀진 유일한 사례”라며 “삼국 및 통일신라와 관련된 문헌자료가 거의 전해지지 않아 이후로도 거주자를 확인할 수 있는 주택의 사례를 찾기 어려울 것으로 생각된다”고 설명했다.

특히 그는 이번 발굴에서 “재매정 택지 내에 중심건물을 비롯한 부속 건물들이 전면 도로 축에 따라 서로 직교하는 질서정연한 배치를 이루고 있다”며 “동일한 시기에 존재했던 것으로 보이는 건물들은 대체로 유사한 칸의 모듈을 따르며, 공적 영역과 주생활 영역을 구성하는 건물들은 개방과 폐쇄라는 원칙에 따라 배치돼 있음을 확인했다”고 강조했다.

이에 따라 “재매정 유적은 신라시대 상류주택인 재매정택이라는 실제 유구를 통해 당시의 모습을 확인할 수 있다는 점에서 가치가 있다”면서 “이를 바탕으로 고대 한국 주택사 연구 영역의 공백을 메울 수 있는 단초를 찾을 수 있을 것으로 기대한다”고 발굴 성과를 평가했다.

◆재매정택 2차 발굴조사 결과는?
경주시는 문화재청의 허가를 받아 (재)신라문화유산연구원에 의뢰해 지난 2013년 7월부터 작년 말까지 재매정을 중심으로 9947㎡ 부지에 대해 발굴조사를 완료했다. 김유신 장군 옛집 부지는 1만1373㎡다.

지난 1991년부터 1993년까지 5127㎡ 부지에 대한 1차 발굴조사 후 복원을 위해 이번에 2차 조사가 진행된 것.

최순조 (재)신라문화유산연구원 조사연구 2팀장은 “이번 2차 조사에서 대형 건물지를 비롯해 우물과 도로, 담장 등 새로운 자료가 다수 확인됐고, 인물상 토우의 등 새로운 유물도 다수 출토됐다”며 “이를 통해 재매정 유적의 성격과 단위 가옥의 영역을 확인했고, 신라시대 도시구획과 가옥배치 등을 알 수 있는 새로운 자료를 확보하게 됐다”고 밝혔다.

최 팀장에 따르면 발굴 유구로는 농로를 중심으로 남쪽의 재매정 주변에서는 건물지 23동, 도로, 담장, 우물 7개소, 석축유구 6개소, 청동기시대 주거지 등이 확인됐다.

북편에는 동~서, 남~북 도로, 배수로와 방리, 단위가옥 등이 확인됐는데 이는 신라시대 도시계획인 방리제에 의한 계획도시의 구체적인 모습을 드러냈다는 것.

특히 남쪽 재매정 주변지역은 하나의 대단위 단위가옥을 확인했다. 이 가옥은 동~서 110m, 남~북 80m, 약 9000㎡ 규모로 확인돼 지금까지 조사된 왕경의 사찰이나 궁궐관련 유적을 제외하면 최대 규모에 해당한다.

또 내부에는 2개의 중심건물을 북쪽에 배치하고 이를 중심으로 장방형 및 회랑형 부속건물이 둘러싼 형태이며, 휴식이나 풍류를 즐기는 공간으로 추정되는 유구도 발견됐다.

이에 따라 최 팀장은 “이러한 공간 구성은 궁궐이나 사원과는 다른 것이어서 귀족계층의 저택, 즉 재매정택일 가능성이 크다”며 “신라시대 귀족계층의 가옥구조를 파악하는데 중요한 자료가 될 것으로 판단된다”고 강조했다.

◆재매정은 김유신 장군 옛집
이날 심포지엄에서는 재매정이 김유신 장군의 고택이었음을 뒷받침하는 발표도 이어졌다. 주보돈 경북대 사학과 교수는 ‘김유신과 재매정’을 주제로 한 발표에서 재매부인에 대해 집중 조명했다. 주 교수에 따르면 김유신 장군의 뒤를 이어 사실상 재매정택을 이끈 것은 재매부인이었다는 것.

재매부인은 무열왕 김춘추의 셋째 딸 ‘지소’로 김춘추와 김유신 두 가문을 끈끈하게 연결해 준 고리 역할을 했다.

지소는 김유신이 환갑을 맞던 655년 출가했으며, 연령을 고려하면 정상적 혼인이 아니라 정략적 혼인이었다.

지소는 김유신이 사망한 뒤 집안의 가장 큰 어른으로서 종가를 제대로 이끌었고, 김유신 종가의 재부를 가져다주는 상징으로 여겨지던 우물을 변함없이 유지 관리했다. 특히 성덕왕은 신라가 전성기를 구가할 수 있게 된 것은 김유신의 공로로 지소를 부인으로 책봉하고 경제적 혜택까지 줘 재매부인이란 이름이 국가적으로도 공인받게 됐다는 것.

이에 따라 주 교수는 “김유신가가 정치적 격동기에 극심한 내부 분란까지 겪으면서도 뒷날 흥무대왕으로 추봉 받고, 재매정이 금입택으로 불리게 된 것은 재매부인 지소의 힘이 적지 않게 작용한 결과”라며 “이는 재매정택을 김유신가의 종택으로 추정할 수 있는 근원이 된다”고 강조했다.

조철제 경주문화원 부설 향토문화연구소 연구위원도 ‘경주의 김유신 유적과 재매정’을 주제로 한 발표에서 삼국유사 등의 기록을 통해 재매정이 김유신 장군의 고택임을 설명했다.

그는 삼국유사에 ‘재매정은 김유신의 후손들이 대대로 살아온 집이라고 했고, 또한 우물이 다른 것보다 크고 특이했다’는 기록이 있다고 밝혔다. 1642년(인조 20년) 정극후가 ‘서악지’를 지으면서, ‘김유신이 서정(西征)할 때 마신물이 지금의 재매정 우물일 것이다’고 기록하고 있다고 강조했다.

또 1872년(고종 9년)에 부윤 이만운이 재매정비를 지으며 ‘재매정은 김유신의 유택(遺宅)이라고 비정했다’고 밝혔다.

이외에도 이날 심포지엄에서는 양정석 수원대 사학과 교수의 ‘신라왕경의 도시구조와 재매정지 유적’, 김상태 한국전통문화대학교 교수 ‘신라주거의 건축적 고찰’, 안계복 대구카톨릭대 조경학과 교수 ‘재매정지 조경 공간 고찰’, 장성재 동국대 인문학부 교수의 ‘김유신 관련 문화콘텐츠 기획’ 등의 발표가 이어졌다.

또 종합토론에서는 주보돈 교수를 좌장으로 선석열 부산대 사학과 교수, 김신재 동국대 국사학과 교수, 이은석 국립부여문화재연구소 학예연구실장, 류성룡 계명대 전통건축학과 교수, 정연상 안동대 건축공학과 교수, 최재영 경주대 조경도시개발학과 교수, 김복순 동국대 국사학과 교수 등이 참석해 열띤 토론을 벌였다.

◆문화재위 심의 후 복원 추진
경주시는 김유신 장군 옛집을 복원해 화랑정신과 오국이 얼을 전승하는 교육의 장으로 활용한다는 계획이다.

또 삼국유사에 기록된 35금입택 중 위치 추정이 가능한 유일한 곳을 중창해 신라문화의 우수성을 홍보할 예정이다.

시는 이번 2차 발굴조사와 학술심포지엄을 통해 확인된 사실을 토대로 기본계획을 완료한 뒤 문화재청 각 분과 위원회의 심의를 거쳐 복원한다는 방침이다.

시에 따르면 문화재위원회 심의 결과에 따라 복원이 추진될 예정이며, 빠르면 2016년 실시설계 용역을 거쳐 건물복원과 경역을 정비하고 2017년까지 홍보관을 건립한다는 계획이다.

◆재매정은?
재매정은 김유신 장군 집에 있던 우물로 사적 제246호로 지정돼 있다. 삼국유사에 언급된 신라 전성시대 귀족의 큰집들인 35금입택 중 유일하게 전해오는 재매정택 안에 있는 우물이다.

김유신 장군이 화랑이 되고, 상장군, 나당연합군 대총관 등으로 일생의 황금기에 살며 마셨다는 우물터로 전한다. (깊이 5.7m, 원형지름 1.8m.)

삼국사기에는 재매정과 김유신 장군에 대한 유명한 일화가 전해진다. 김유신이 백제와의 전투에서 연승하고 궁궐로 입성하는 중, 또 다시 백제군의 재침을 막으라는 어명이 떨어졌다.

김유신은 재출정하면서 바로 자기 집 앞을 지나면서도 가족을 외면한다. 한참 후에야 부하를 시켜 자기 집 우물물을 떠오게 해 마시면서 ‘우리 집 우물물이 예날 맛을 그대로 간직하고 있다’고 하고 전장으로 떠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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