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북 경주는 찬란한 신라 역사를 품은 고도다. 하지만 경주엔 ‘신라’만 있는 게 아니다. 고려시대엔 영남지역 행정중심인 안동도호부가, 조선시대엔 경상좌도 감영이 설치됐던 도시다. 일제강점기엔 수많은 고대 유적을 기반으로 한반도 최고 관광지라는 명성을 누렸다. 경주읍성과 옛 경주역 인근엔 지금도 근대기의 소박한 풍경이 반짝이고 있다. 신라 천년고도에 남겨진 지난 백년의 흔적을 소개한다. /편집자 주
도톰한 입술, 크고 시원한 눈매, 미간 사이로 자연스럽게 흘러내리는 콧대. 위로 살짝 들어 올린 여인의 입꼬리에선 수줍은 듯 해맑은 미소가 묻어난다. 수막새 기와 끝 둥근 공간에 눈·코·입만으로 1400여 년 전 신라 여인의 미소를 절묘하게 표현했다. ‘신라의 미소’란 수식어로 널리 알려진, 보물 제2010호 ‘얼굴무늬 수막새’다.
이 얼굴무늬 수막새와 관련이 깊은 근대 건축물이 경주에 남아 있다. 경주경찰서 인근 화랑수련원 건물이 그곳이다.
옛 건물에 깃든 ‘명작의 비밀’
화랑수련원은 경주시 동부동에 있는 경주경찰서와 편도 1차선 도로를 사이에 두고 서로 마주보고 있다. 주황색 지붕에 노란색 벽면, 주변 건물과는 확연히 다른 외관은 누가 보더라도 이 건물이 근대건축물이라는 것을 짐작하게 한다.
이곳엔 일제강점기 경주 첫 서양식 의원이 있었다고 전해진다. 병원 이름은 야마구치(山口)의원이었다.
야마구치가 단순히 건물 이름이었는지, 아니면 병원장 이름이었는지는 확실하지 않다. 그러나 1920~30년대 언론 보도 등에 경주지역에서 ‘야마구치’란 이름의 의사가 가끔씩 등장하는 것으로 미뤄보면 병원장 이름이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건물이 지어진 시기에 대해서도 “1920년대에 지어졌다”, “1930년대에 지어진 건물이다” 등 의견이 분분하다. 하지만 1934년에 촬영한 것으로 추정되는 사진자료에 당시 건물 모습이 보이고, 1931년 발행된 ‘읍내시가지도’에 야마구치 의원이 표기된 것으로 미뤄보면, 최소 1931년 이전에 지어진 것으로 미뤄볼 수 있다.
이 건물은 하마터면 얼굴무늬 수막새를 영영 잃어버릴 뻔했던 드라마 같은 사연을 간직하고 있다.
일제강점기인 1930년대 초(1933년에서 1934년 사이로 추정) 야마구치 의원에서 의사로 일하던 다나카 도시노부(田中敏信, 1908~1993)는 흥미로운 소식을 들었다. 경북 경주 사정동에서 독특한 와당인 수막새 한 점이 발견됐고, 일본인 골동품상인 구리하라(栗原)에게 넘어갔다는 것이었다.
목조건축에서 지붕의 기왓골 끝에 얹는 수막새의 무늬는 대개가 연꽃인 경우가 많다. 그러나 이 수막새에는 사람의 얼굴이 그려져 있었다. 1933년 한국으로 건너와 의사로 일하며 경주에서 출토되는 골동품을 수집하던 20대 중반의 청년의사 다나카는 구리하라의 가게로 달려가 주저 없이 100원을 주고 이 수막새를 구입했다. 당시 기와집 한 채 값이 1천원 정도였다고 한다.
이 같은 내용은 1934년 6월 조선총독부 기관지인 ‘조선’ 제229호에 ‘신라의 가면화’란 이름으로 사진과 함께 실렸다. 오사카 로쿠손(大坂六村)이라는 필명으로 발표된 이 글을 쓴 이는 훗날 조선총독부박물관 경주분관(지금의 국립경주박물관) 관장을 지낸 오사카 긴타로(大坂金太郞·1877~1974)였다.
오사카 긴타로는 1915~1930년 사이 경주 공립보통학교(지금의 계림초등학교)에서 교사와 교장으로 근무하다 정년퇴임했다. 이후 1932년 국립부여박물관의 전신인 조선총독부 박물관 부여분관장으로 역임했고, 1934년 경주분관으로 돌아온 뒤 1938년부터 해방이 될 때까지 제3대 경주분관장을 지냈다. 총독부 기관지 ‘조선’에 얼굴무늬 수막새를 소개한 1934년 6월은 오사카가 부여에서 경주분관으로 복귀한 직후였다.
종적 감춘 지 30여년 만에 귀향
이 수막새는 3개월 뒤인 1934년 9월 하마다 고사쿠(濱田耕作, 1881~1938)와 우메하라 스에지(梅原末治, 1890~1983)의 보고서 ‘신라 고와 연구’에 다시 한 번 소개된 이후 자취를 감춘다.
소장자인 다나카가 1940년 일본으로 돌아간 탓이다. 이후 그는 태평양전쟁이 한창이던 1944년까지 필리핀 전선에서 군의관으로 복무했다.
다나카는 1940년 귀국 때 얼굴무늬 수막새도 함께 가져간 것으로 추정된다. 물론 다나카가 1940년 이전에 일본으로 옮겨놓았을 가능성도 있다. 어쨌든 하나밖에 없는 이 독특한 수막새는 고향 땅인 경주에서 자취를 감추게 된 것이다. 그러곤 사람들의 기억 속에서 잊혔다. 24년이 흐른 1964년 이 수막새를 기억하고 있던 이가 있었다. 당시 국립박물관 경주분관의 박일훈(1913~1975) 관장이었다.
박 관장은 1927년 5월부터 1929년 3월까지 경주공립보통학교를 다녔다. 얼굴무늬 수막새를 소개한 오사카 긴타로는 이 무렵 이 학교의 교사였고, 박 관장과는 스승과 제자 사이였다. 이런 인연으로 박 관장은 스승이 관장으로 있던 경주분관(박물관)에서 근무하게 된다.
1964년 박 관장은 일본에 있는 오사카로부터 한 통의 편지를 받는다. 신라사 연구 협조에 관한 내용이었다. 이후 두 사람은 이따금씩 편지를 주고받게 됐고, 그 과정에서 박 관장은 수막새의 존재를 기억해냈다.
이후 박 관장은 1967년 일본을 방문하면서 오사카에게 수막새의 소재를 확인해달라고 부탁했다. 오사카는 수소문 끝에 소장자인 다나카 도시노부의 소재를 찾는 데 성공했다. 다나카가 후쿠오카의 기타큐슈에서 병원을 운영하고 있으며 수막새를 그대로 간직하고 있다는 사실을 알아낸 것이었다.
소식을 전해들은 박 관장은 오사카에게 “한국에 하나뿐인 얼굴무늬 수막새인 만큼, 기증이 성사될 수 있도록 주선해 달라”고 부탁했다. 오사카도 적극 협조하기로 약속했다. 그는 다나카에게 수차례 기증을 권유하는 편지를 쓰고 직접 만나 설득하는 노력을 기울였다.
9년에 걸친 이들의 간절한 요청은 결국 다나카의 마음을 움직였다. 다나카는 그해 10월 직접 경주박물관으로 찾아와 “마음속에 감명을 주는 인면와(人面瓦)를 제작한 와공을 생각하며 신라 땅에 안식처를 제공하고자 경주박물관에 기증합니다”라는 기증서와 함께 수막새를 기증했다.
얼굴무늬 수막새 기증은 박 관장과 오사카의 9년에 걸친 간절한 노력과 설득의 결과였다. 다나카는 자신이 한국에서 수집한 기와와 탁본 등 160여 점을 이미 기타큐슈시립박물관에 기증한 상태였다. 그런데 이 얼굴무늬 수막새 한 점만은 기증하지 않았다고 한다. 다나카가 이 얼굴무늬 수막새를 얼마나 아꼈는지를 말해 주는 대목이다.
그는 얼굴무늬 수막새를 자신의 집 거실에 걸어놓았다고 한다. 그는 매일 이 신라의 미소와 눈을 마주쳤을 것이다. 그토록 아꼈던 신라 기와 한 점. 너무나 소중했기에 결국엔 그 기와가 원래 있었던 신라 땅으로 돌아가야 한다고 생각했던 것이었을까. 어쩌면 이 일본인 의사의 수집과 기증이 없었다면 우리는 ‘신라의 미소’가 지닌 매력을 영영 만날 수 없었을지도 모른다.
다나카 도시노부는 1993년 세상을 떠났다. 그러나 그가 1930년대에 근무했던 경주 야마구치 의원 건물은 그대로 남아 있다. 그가 이 수막새를 구입했던 골동품 가게도 건물 근처 어딘가에 있었을지도 모를 일이다.
글·사진 김운 역사여행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