계림에는 이런 이야기가 전해지고 있다.
경주에는 다른 도시에 비해 숲이 많은 편이다. 왕릉을 비롯한 고분들은 대부분 숲속에 안온히 안겨있다. 이곳 계림은 그냥 숲이 아니다. 경주 김씨의 시조인 김알지의 탄생 설화가 전해지고 있는 신성한 곳이다.
요즈음 계림은 초등학생들의 소풍 장소, 학생 그리기 대회 및 백일장이 열리고, 시민들도 휴식 장소로 자주 찾는 곳이다.
경주 사람들은 이 숲을 ‘계림 숲’이라고 한다. ‘역전 앞’과 마찬가지로 잘못된 표현임에도 지금까지 계속 그렇게 불려왔던 것이다. 따라서 계림 숲이 아닌 계림이라고 해야 한다.
계림은 첨성대의 남쪽, 월성의 서북쪽에 있다. 계림의 북서쪽에는 내물왕릉을 비롯한 5기의 고분이 있고, 서쪽으로는 경주향교와 최부자 고택이 자리하고 있다.
『삼국사기』와 『삼국유사』 그리고 『신증동국여지승람』에 이곳 계림과 관련된 설화를 전하고 있다.
먼저 『삼국사기』 「신라본기」 ‘탈해이사금’조 기록은 다음과 같다.
“9년(AD. 65) 봄 3월 왕이 밤에 금성 서쪽 시림의 나무 사이에서 닭이 우는 소리가 나는 것을 들었다. 날이 샐 무렵에 호공을 보내 어찌된 일인지를 알아보도록 하였다. 호공이 가보니 나뭇가지에 금빛으로 빛나는 작은 상자가 걸려 있었고, 흰 닭이 그 아래에서 울고 있었다. 호공이 돌아와 이를 보고하였다. 왕은 사람을 보내 그 상자를 가져와 열게 하였다. 그 속에는 어린 사내 아이가 들어 있었다. 그 아이 얼굴이 매우 잘 생겼다. 왕이 기뻐하며 측근들에게 ‘이 아이는 어찌 하늘이 나에게 아들로 준 것이 아니겠는가!’라고 말하고, 그 아이를 거두어 길렀다. 아이는 자라면서 총명하고 지략이 뛰어났다. 그의 이름을 알지(閼智)라 하고, 금빛이 나는 상자에서 나왔기 때문에 성을 김씨라고 하였다. 이후 시림을 고쳐 계림이라 하고, 이를 국호로 하였다.
『삼국유사』 「기이」 ‘김알지 탈해왕대’의 기록은 이렇다.
영평(永平) 3년(AD. 60) 8월 4일에 호공이 밤에 월성 서리(西里)를 걸어가는데, 크고 밝은 빛이 시림(始林) 속에서 비치는 것이 보였다. 자줏빛 구름이 하늘로부터 땅에 뻗쳤는데 그 구름 속에 황금 궤가 나뭇가지에 걸려 있고, 그 빛은 궤로부터 나오고 있었다. 또 흰 닭이 나무 밑에서 울고 있었다.
이 일을 호공이 왕에게 아뢰었다. 왕이 그 숲에 가서 궤를 열어보니 동자가 있는데 누웠다가 곧 일어났다. 이것은 마치 혁거세의 고사(故事)와도 같았으므로 그 말 따라 그 아이를 알지(閼知)라고 이름지었다. 알지란 곧 우리말로 어린 아기를 일컫는 것이다. 그 아이를 안고 대궐로 돌아올 때 새와 짐승들이 서로 뒤따르면서 기뻐하여 뛰놀고 춤을 추었다. 왕이 좋은 날을 택해 그를 태자(太子)로 책봉했다. 그는 뒤에 태자의 자리를 파사왕(破娑王)에게 사양하고 왕위에 오르지 않았다. 금궤에서 나왔다 하여 성을 김씨라 했다.
이후 알지는 열한(熱漢)을 낳고, 열한은 아도(阿都)를 낳고, 아도는 수류(首留)를 낳고, 수류는 욱부(郁部)를 낳고, 욱부는 구도(俱道; 혹은 구도仇刀)를 낳고, 구도는 미추(未鄒)를 낳으니 미추가 왕위에 올랐다. 이리하여 신라의 김씨는 알지에서 시작된 것이다.
두 사서의 기록을 비교해 보면 새벽이 아닌 밤중에 흰 닭이 울어 가까이 가보니 김씨의 시조인 김알지가 황금 궤에 들어 있었다는 것이다. 그러나 알지를 발견한 시기가 『삼국사기』는 AD. 65년 3월이고, 『삼국유사』는 AD. 60년 8월로 5년의 차이가 있다. 그리고 유사에서는 알지 이후 6대손까지의 가계가 기술되어 있는 등 기록이 더 구체적이다.
『신증동국여지승람』의 기록은 『삼국사기』의 내용을 그대로 인용하고 있다. 단지 알지의 태를 풀 때 가위를 놓았던 흔적이 있는 높이 3척의 돌이 이 숲 속에 쌓여 있다고 했으나 지금 그 흔적은 찾아볼 수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