햇소금 古代                                                  장석남       마을 이장님으로부터, 신청한 김장용 햇소금을 받았다고 그것도 세포씩이나 받아 뒤꼍 처마 밑에 작년 것의 후배로 나란히 쌓아두고 돌아 나와 툇마루에 걸터앉아 쉬자는데 집 어디선가 조용한 흥얼거림이 시작되었다고 집 안에는 나 혼자뿐이니 귀 기울이지 않을 수가 없었지 잔잔한, 손바닥만 한 소리가 흰빛의 손수건과도 같이 자꾸만 내게 건너오는 거야 왜인지 나는 무섭지도 않았지 누가 시키지도 가르쳐 주지도 않았으나 나는 차돌멩이 하나를 찾아 찬물에 씻어서는 그 새 소금 포대 위에 작년 것과 같이 올려두었지 그러자 흥얼거림도 잦아드는 거였어 그것은 어떤 영혼이었던 거 먼 고대로부터 온 흰 메아리 모든 선한 것들의 배후에 깔리는 투명 발자국 나는 명년에도 후년에도 이장님께 신청할 테야 그 희고 끝없는 메아리     소금, 고대로부터 온 희고 끝없는 메아리    서울과는 제법 멀리 떨어진 작은 마을에 고적하게 사는 시인이 김장용 햇소금 세포를 받은 소회와 고백이 얼마나 간절한지, 초겨울 햇살이 내리쬐는 거실 의자에 앉아 그 사연을 읽는 마음이 다 시큰하다. 아주 오래전 조개껍데기와 함께 화폐로도 통용이 되었다는 기록이 있으니, 소금이 우리 삶에 얼마나 긴요하게 쓰였을지는 짐작하기 어렵지 않다. 바다에서 햇살과 바람으로 결정된 그들이 김장철을 맞아 해마다 집에 찾아온다. 화자는 그것을 “뒤꼍 처마 밑에 작년 것의 후배로 나란히 쌓아”두고 잠시 쉬는데, 그 ‘후배’는 선배의 반대어인 ‘後輩’일까? 여러 줄로 늘어섰을 때의 뒷줄이라는 뜻의 ‘後排’일까? 어느 것으로 읽어도 무방하지만 한 고향에서 온 후배라는 말이 더 어울린다. 놀라운 건 그 소금포대로부터 “돌아 나와 툇마루에게 걸터앉아” 있는데도, 집 어디선가에서 “조용한 흥얼거림이 시작”된다는 사실이다. 말 이전, 바닷물의 융성한 숨결 같은 “손바닥만 한 소리가/ 흰빛의 손수건과도 같이 자꾸만” 건너오는 것이다. 짐짓 “왜인지 나는 무섭지도 않았지” 시침을 떼고 있지만 본능적으로 흥얼거리는 소릴 듣는 화자의 마음을 짐작하기 어렵지는 않다. 포대 위에 찬물에 씻은 차돌멩이 하나를 얹는 건 그 소리를 침묵하게 하려는 의도가 아니라 소금의 영혼을 토닥이며 잠재우는 엄마의 행위와 같지 않을까. 그렇다고 해도 소리는 완전히 사라지지는 않을 것이니, 시인은 여기서 슬쩍 묵은 포대와 햇포댓 속, 고향에서 온 선후배끼리의 숨결도 자연스럽게 이끌어내고 있는 것이리라. “조용한 흥얼거림”에서 발원한 시인의 소금에 대한 감각이 “어떤 영혼”, “먼 고대로부터 온 흰 메아리”, “모든 선한 것들의 배후에 깔리는 투명 발자국”이라는 비유로 이어지는 지점에 이르러서는 소금의 생산과 덩어리의 결정 과정, 형체도 없이 스며드는 소금의 자질이 오롯이 형상화되어 있지 않은가? 시인은 명년에도 후년에도 “그 희고 끝없는 메아리”를 듣고 설레기 위해 이장님께 소금을 신청할 거라고 소금 족속의 후예임을 자청한다. 소금의 행로가 선연히 우리 영혼에 쌓이고 머물다 가는 시편 앞에서 우리는 태초의 생명이 인간에게 말을 거는 소리를 듣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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