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는 살아가면서 자의든 타의든 많은 말을 하게 된다. 일반적으로 사람들이 나이가 들어가면서 말이 많아진다. ‘저 사람은 물에 빠지면 입만 뜬다’는 말이 한때 유행했는데 이는 입이 가볍거나 말을 많이 하는 사람보고 하는 소리다. 그러다가 ‘저 사람은 물에 빠지면 입이 물속으로 가라앉는다. 물고기와 말을 주고받기 위해서다’라는 우스개 말도 생겨났다. 근래는 나이가 들면 기(氣)가 입으로 모여 말이 많아진다고들 한다.   필자도 나이가 들면서 말이 많아졌다. 특히 했던 말을 하고 또 하고를 반복하는 경향이 있다. 그런 줄 알면서도 했던 말을 고장난 레코드처럼 자꾸 하게 된다. 나이가 들수록 지갑은 열고(pay up) 입은 닫으라고(shut up) 하는데 그게 쉽지 않다. 사람들이 주변 사람들과 어느 정도의 말을 하는 것이 반드시 나쁜 것만은 아니다. 친한 사람들과 말을 하면서 마음속에 있는 것을 털어놓아야 스트레스가 해소되기 때문이다. 사람들이 말을 많이 하는 것은 동서양 구분이 없다. 뒤에서 다른 사람 말을 하는 것도 동서양이 크게 다르지 않다. 특히 술을 한 잔 마시게 되면 말이 많아지면서 다른 사람 말을 하고 흉을 보기도 한다. 또 술을 마시면서 약속이나 거래를 하고 사업 구상을 하기도 한다. 우리나라에서는 고래(古來)로 술을 마시면서 했던 여러 가지 말들은 심각하게 생각하지 않는 경향이 많다. 술자리에서 나눈 대화는 보통 자고 일어나서 술이 깨면 대부분 잊어버리기 때문이다. 누가 이를 문제 삼으면 ‘술자리에서 한 얘기’라고 일축해 버린다. 그러나 잊지 않고 지켜야 할 내용도 가끔씩 있다. ‘술과 약속’이라면 역사학의 아버지로 불리는 헤로도투스의 ‘역사’(The Histories)에 나오는 스키타이족들의 관습 하나가 생각난다. 과거 스키타이족들은 술을 마시면서 약속이나 거래를 했다면 며칠 후 반드시 맨정신으로 이를 확인하였다. ‘친구야, 우리 며칠 전에 같이 술 마시면서 이런저런 거래를 하기로 약속했는데 맞나?’ ‘그래, 그대로 해야지’라고 하면 거래가 성사된다. 그런데 ‘그때 많이 취해 있어서 아무것도 기억나지 않는데’라고 하면 거래는 없었던 것이 된다. 반대로 스키타이족들은 맨정신에 무슨 거래를 하기로 약속했다면 며칠 후 술을 마시면서 다시 이를 확인하였다. 친구와 함께 술을 마시면서 취기가 어느 정도 올라왔을 때 ‘어이 친구, 며칠 전에 우리 무슨 거래를 하기로 약속했는데 기억나?’ ‘그럼, 기억나지’라고 하면 일이 성사되는 것이고 ‘그런 적이 있었나? 모르겠는데’라고 하면 모든 거래 약속은 지워진다. 거의 2800년전 의 먼나라 이야기이지만 흥미로운 관습이다. 필자가 약 10여 년 전에 친구 두 명과 술을 마시면서 신라 음식을 재현/복원하는 연구 프로젝트를 같이 해 보자는 약속을 한 적이 있었다. 그러나 그 이후 지금까지 그 친구들과 몇 번 만나기는 했지만 신라 음식 연구 프로젝트에 관한 어떤 말도 들어 본 적이 없다. 필자 이외에 아무도 그것을 기억하지 못했으며 별로 흥미를 느끼지도 않았고 그냥 술김에 한 말이었던 것으로 짐작된다. 그 두 사람은 필자보다 술을 자주, 많이 마셔서 술에 센 데도 불구하고. 스키타이족들의 ‘술과 약속’ 관습을 생각하면서 속으로 웃어넘겼다. 근래 사정이 달라졌지만 얼마 전까지만 해도 우리나라는 ‘술 권하는 사회’였다. 필자는 소주 한 병 정도 주량은 되지만 웬만해서는 술을 마시지 않는다. 특히, 음주 운전은 금물이기 때문에 차를 몰거나 심지어 자전거를 타고 다닐 때도 술은 마시지 않는다. 술 마시고 자전거를 타면 이것도 음주 운전에 걸리기 때문이다. 그래서 내가 가입해 있는 테니스 동호회 회식 자리에서 누가 술을 권하면 ‘나는 술 마시면 주사(酒邪)가 있다’라고 하여 사람들이 지레 겁을 먹고 술을 권하지 않았다. 오랫동안 그 말이 통했다. 이제 웬만한 사람들은 내가 싱거운 소리 하는 줄 알고 주사를 해도 괜찮으니 그냥 마시라고 한다. 다른 한편, 술을 마시면서 즐거운 시간을 보내는 것을 보노라면 부러울 때가 많다. 술을 마시고 희거나, 싱거운 소리를 하더라도 술은 사람들의 정신건강과 원만한 사회생활에 중요한 역할을 한다. 술 약속이 많아지는 계절이다. 술 약속이 있으면 대중교통을 이용해서 가족과 타인을 지키고 특히 본인이 쌓아 놓은 공든 탑이 무너지지 않도록 하는 현명함이 필요하다.
주메뉴 바로가기 본문 바로가기